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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포크와 나이프로 먹는 배추전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에밀리의 집을 나와 새로 구한 집.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함께 살게 된 플랫메이트는 콜롬비아 출신 아벨미(29세)와 칠레 출신 알바로(45세).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달랐기에, 이제 막 들어온 내가 먼저 나서기는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그중에서도 아벨미는 처음부터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몰타에 온 지 2년이 넘었다는 그는 영어 발음도 깔끔해서 초보자인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듣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는 태도에도 배려가 묻어났다.


알바로에게도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 내 한국식 발음을 듣더니,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 달라고 했다. 악센트를 넣어 "알베로"라고 불러야 한다며 강조했다. 내겐 ‘알바로’나 ‘알베로’나 거기서 거기 같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렇게 불러주니 흐뭇해하길래, 나도 웃으며 그렇게 불러주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알바로는 유학원 오후 수업이 있다며 나갔다. 나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을 정리하고, 잠깐 휴식을 취하다가, 그가 돌아올 시간쯤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요리를 하면서, 에밀리와 함께 살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부엌에서 요리할 때마다 소리가 날까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지냈던 10일 남짓은 정말 지옥 같았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다 비슷해 보여도, 가까이서 지내보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말로만 듣던 ‘사람 운’이란 걸, 나도 여기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금은 새 시작. 행복한 생활을 기대하며, 아벨미에게 한국 음식 중 하나인 배추전을 해주겠다고 하자, 뭔지는 몰라도 “고맙다”라고 웃으며 말해줬다. 콜롬비아 친구들은 정말 립서비스가 좋다. 항상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니, 듣는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배추전은 예전에 기숙사 친구들에게 해줬을 때도 반응이 좋았다. 한식을 모르는 외국인들도 비교적 쉽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이라 생각해서, 미리 준비해 둔 재료로 만들기로 했다. 준비하지 못한 계란 두 알은 아벨미에게 빌렸다.


요리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벨미는 한식을 들어보기만 했지, 실제로 먹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내가 “내 친구 요한은 김치를 못 먹는다”라고 말하자, 아벨미는 “나는 김치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김치를 내밀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넙죽 받아먹었다.

배추전도 “정말 맛있다”라고 칭찬하며, 다음에 또 만들면 비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도 흔쾌히 “언제든지!”라고 대답했다.

좌 아벨미, 우 알바로


저녁을 먹고 있을 무렵, 수업을 마친 알바로가 돌아왔다. 우리는 셋이서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첫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알바로의 식사 모습이 조금 재미있었다.
그는 칠레 사람답게 나이프와 포크로 배추전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먹었다.
‘한식이 다른 나라에 오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 맛있다!”며 먹는 모습을 보며, 우리 대화도 한층 자연스러워졌다. 두 친구 모두 “고맙다”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날 밤 10시쯤 잠자리에 들었지만, 불면증 탓에 새벽 2시부터 뒤척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불면 외에도 불청객이 하나 더 있었다.
모기. 언제 들어왔는지 밤새도록 귀 옆에서 웽웽거렸다.
몇 번이고 휴대폰 손전등을 켜며 쫓아다녔고, 마침내 새벽 4시, 벽에 붙은 모기를 발견하고 손바닥으로 처참히 눌러 죽인 뒤에서야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침, 학교 수업에 나가기 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벨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정작 수업 시간에는 몹시 피곤함을 느꼈다.

수업 후 집에 돌아와 거실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나온 아벨미 소리에 깼고, 오늘 저녁엔 김밥을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김밥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지만, 여기서는 귀한 음식이다. 몰타의 한국 식당에서도 김밥 한 줄이 만 원이 넘는다.
단무지, 오이, 당근, 햄 같은 다양한 재료는 생략하고, 오늘은 시금치와 계란만 넣은 간단한 김밥을 만들었다.

아벨미는 김밥을 보자마자 사진부터 찍으며 “맛있겠다”라고 감탄했다.
그 말 한마디에 힘든 줄도 몰랐다. 진심이든 아니든, 칭찬은 사람을 웃게 만든다.

검은색 김과 쌀밥이 생소했을 텐데도, 두 친구 모두 거부감 없이 받아주었다.
한 줄씩 싸서 나눠주며, “한 입에 쏙 넣어야 맛있다”라고 설명하자, 그들은 곧잘 따라 했다.


김밥을 먹고 난 뒤 아벨미는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동양인이 아닌 그가 이렇게 아시안 스타일로 인사하니 깜짝 놀랐다.

“그런 인사 어디서 배웠어?” 묻자, 과거 랭귀지 스쿨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에게 배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깍듯한 인사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룸메이트 요한에게도 이런 인사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서 일하다 보니 동양인을 자주 만나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작고 따뜻한 순간들이 나를 웃게 했다.


갑자기 부모 같은 감정이 들어, 혼자 타국에서 사는 그를 더 챙겨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하루는 야간근무를 나가는 아벨미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잘 갔다 와. 내일 아침에 네가 돌아올 때 반겨줄게.”

그는 고맙다며 웃었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새집에 온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음식 하나로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래서 주말에는 셋이 함께 근처로 여행 가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 모두 흔쾌히 좋다고 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우리가 이 작은 섬나라 몰타에서 만난 건 정말 기적 같은 인연이다.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서로 돕자.”라고 말하자, 두 사람도 “언제든지”라고 대답해 줬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요한, 아벨미, 알바로—이 세 사람을 이 먼 타국에서 만나게 해 준 어떤 힘에 대해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들과 함께 할 시간들이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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