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타국에서 두 달 넘게 살아보니, 결국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나 집 구조 같은 겉모습만 다를 뿐, 중요한 건 어디서나 문서로 남기고 계약으로 약속을 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영어로 된 계약서는 여전히 나에겐 어려웠다. 계약 해지 시 배상 조항 같은 건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하느라 번역기를 몇 번이나 돌려야 했다.
새로운 계약을 마친 날 밤. 원래는 에밀리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려 했지만, 솔직히 마음은 새집에 더 가 있었다. 그래도 아직 보증금 500유로를 돌려받지 못한 상태라 무작정 짐을 싸들고 나올 수는 없었다.
75만 원이라는 돈,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돈을 벌지 않고 쓰기만 하고 있어서 작은 돈이라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밤 9시, 에밀리의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열자 그녀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작업 중이었다.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워 ‘아차, 양치 안 했네’ 싶었지만, 다시 나가 그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생략하기로 했다.
새벽 3시쯤, 갑작스러운 배뇨감에 잠이 깼다. 문틈 사이로 거실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 보며 ‘아직 누가 있나?’ 싶어 기다려봤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결국 새벽 6시에 참다못해 나왔는데, 불만 켜져 있을 뿐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밤새 일하다가 그대로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에밀리의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나는 조용히 화장실을 이용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다시 7시에 기상했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오늘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전략이 좋을지 곰곰이 고민했다.
하지만 에밀리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아침 식사만 간단히 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나와 집을 청소하다가 다시 대화를 요청해 왔다. 거절할 수 없어 결국 마주 앉게 되었다.
그녀는 “당신이 집을 나가는 조건으로, 보증금을 한 달 뒤에 돌려주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민 문서를 번역해 보니, ‘오늘 당장 집을 비우는 조건’으로 환불을 해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당장 집을 빼고 고생을 해보라는 악감정을 가지고 아무 설명도 없이 몰래 장난을 친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지금 당장 짐을 다 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따졌다.
하지만 에밀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늘 나가지 않으면 환불 조건도 무효다.” 단호했다.
이미 새집 계약을 마친 상태라 마음에 여유는 있었지만, 이런 무례한 태도는 도저히 넘길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제안한 서류에 서명은 하되, “오늘은 집에서 자고 내일 집을 못 구하면 호텔이라도 가겠다”며 거짓말로 시간을 벌었다.
사실 새집을 구할 당시, 보증금을 못 받을 수도 있겠다고 각오하고 있었기에, 한 달 뒤라도 돌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내심 안도했다.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요한과 점심을 먹으며 사정을 설명했고, 짐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 하니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 마침 마트에 가던 한국인 친구 셋도 “이사 간다”라고 하니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다섯 명이 함께해서 한 번에 이사를 끝낼 수 있었다.
친구들이 새집을 둘러보고는, 햇빛도 잘 들고 훨씬 깨끗하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더 든든해졌다.
잠시 후, 새 룸메이트 아벨미가 샤워를 마치고 타월만 걸친 채 등장했다.
조금 민망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나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줬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지만, 여긴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친구들이 돌아간 뒤 나는 조용히 전 집주인 에밀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오후에 짐을 빼고 열쇠는 방에 두고 나왔습니다.”
간단히 요점만 적었다. 그녀와는 더 이상 예의를 갖춰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에밀리에게서 답장이 왔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지내길 바랍니다.”
그녀답게 인사를 먼저 건넨 형식적인 문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가식적인 응답에 답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더는 앞으로 그녀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보증금을 돌려받기로 한 서류도 있으니, 이제는 정말 끝이다.
드디어 진짜 내 공간에서, 편안한 첫날을 맞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