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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감정을 정리하듯 짐을 꾸렸다.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우연히 페이스북을 보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새로 방이 나왔다는 글을 보았다. 신축이라는 말에 이끌려 급하게 연락을 했고,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사실 집주인 에밀리와의 생활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더는 그녀와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더 살다 간 우울증이라도 올 것 같았다.
보증금을 떼일 각오까지 하며, 나는 새 집을 찾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막상 집을 보러 가니 신축답게 깔끔했고, 방은 총 세 개. 그중 두 개는 이미 다른 임차인이 쓰고 있었고,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방은 하나 남아 있었다.
거주자 정보를 들어보니 콜롬비아와 칠레 출신의 남성들이라고 했다. 다들 나이가 있어 보였고, 적어도 문제를 일으킬 사람들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집을 구경하러 온 여자 두 명이 먼저 약속이 되어 있다며 중개인을 따라가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이 집의 최종 선택권은 그들에게 있는 듯했다. 하지만 구성원이 전부 남자다 보니, 그들도 고민이 많아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집을 알아보겠다”며 떠났다.
그 순간, 선택권은 내게로 넘어왔다.

작은 내 방


잠시 후 집주인도 집으로 들어왔고, “이 집은 내가 직접 지은 새 집이에요. 정말 괜찮을 거예요.”라며 자신 있게 소개했다.
에밀리의 집처럼 집주인과 함께 사는 게 아니고, 모두 외국인 임차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바로 입주 의사를 밝혔고, 중개인은 그날 일부 보증금을 받고 다음 날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여니,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에밀리가 말을 걸어왔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복잡했고, 그녀에 대한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금 보고 온 집과 아직 계약을 확정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일이 꼬일까! 걱정되었다.


나는 “피곤하니까 다음에 얘기하자”라고 둘러대며 대화를 피했다.

그건 어쩌면, 내가 이제는 에밀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예정대로 중개인을 만나 새 집에 대한 계약을 마쳤다. 계약서를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이제 정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이 집은 집주인이 함께 살지 않는 구조였고, 전부 외국인 임차인으로 이루어진 집이라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밀리의 방과 비교를 하자면 내 방은 정서향이라 여름이 되면 더울 것 같았고, 창문은 나무 가림문을 열고 다시 유리창을 열어야 하는 구조라 조금 번거로웠다.
게다가 1층이라 창문을 열면 외부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사생활 보호에 있어선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에밀리의 집은 사실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집 상태도 괜찮았고, 첫인상도 무난했다.
그러나 살아가며 느끼는 집주인의 눈치, 참견, 그리고 말로 표현되진 않지만 동양인에 대한 미묘한 무시까지, 하루하루가 지치는 나날이었다.


새로 구한 집은 그런 점에서 천국 같았다. 가구며 침대, 식기까지 모두 새것이었고, 무엇보다 집주인이 친절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들어주려 노력했고, 말투나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새 집은 에밀리의 집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에밀리의 이름을 새 집주인에게 꺼내지 않기로 했다.
혹시라도 알게 모르게 친척이거나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니까.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날 나는 새집에 몇 가지 짐만 옮겨두고, 아직 본격적인 이사는 하지 않은 채 에밀리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쩌면 이 평정심이, 이젠 정말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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