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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케빈, 진짜 선생님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여기 몰타에 온 이후로 일상과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기록해 왔지만, 정작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걸 수업을 듣던 중에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평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오전 3시간씩 어학수업을 듣고 있다. 랭귀지스쿨은 수준별로 총 6단계로 나뉘어 있고, 학생들은 각자의 실력에 맞는 반에 편성되어 수업을 듣는다. 실력이 오르면 학기 중 언제든 상급반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일정한 주기마다 레벨 테스트가 있어서 더 빠르게 상급반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사전 테스트를 거쳐 Intermediate 레벨에 배정되었지만, 실제로 수업을 듣다 보니 듣기와 말하기 실력이 생각보다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학교 측에 요청해 한 단계 낮은 반으로 다시 배정받았다.

사전 테스트는 문법 중심의 문제들이 대부분이었고, 독해나 청취력, 말하기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특히 듣기 문제는 단 한 문제도 없었기 때문에, 나처럼 문법만 많이 공부해 온 학생들은 실력보다 높은 반에 배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지에 와서야 내 진짜 실력이 드러난 셈이다.


이곳 랭귀지스쿨은 담임제 수업이 아닌, 과정별로 교사가 유동적으로 바뀌는 시스템이다. 덕분에 반을 옮기지 않더라도 여러 명의 교사를 만나게 된다. “레벨을 바꾸지 않아도 결국은 이 학교 모든 선생님을 다 만나보겠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까지 우리 반을 지나간 선생님은 메리얀, 페트라, 마르코, 그리고 지금의 선생님인 케빈까지 총 네 명. 남녀 비율도 딱 반반이었다. 교사마다 스타일이 다 달라서 매번 다른 분위기의 수업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아직 원어민 선생님들과 수업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 ‘어떤 선생님이 더 낫다’, ‘누가 별로였다’고 평가하는 건 조심스럽다. 대신 지금 우리 반을 맡고 있는 케빈 선생님에 대해서는 조금 이야기해보고 싶다.


케빈은 다른 교사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교재를 중심으로 하는 수업보다는, 매일 아침 수업 시작 전에 어휘나 숙어 퀴즈를 통해 가볍게 분위기를 띄운다. 수업 중엔 거의 쉴 틈 없이 설명을 해주는데, 말 그대로 쉼 없이 말을 한다.


그리고 그는 만화 작가같다. 그는 영어 문장을 보드에 작성할때마다 등장 인물, 배경, 대화 장면을 만화의 한장면인 것처럼 그림을 그리면서 능숙하게 학생들에게 설명을 해준다.


하루 종일 말을 하는 게 직업이지만, 정말 지치지도 않고 열정적으로 수업을 이끌어가는 걸 보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내 영어 실력으로는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해, 수업 중간중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저렇게 열심히 설명해 주는데, 내가 못 알아들어서 어쩌나..." 싶은 마음.

무엇보다 케빈은 ‘문법 전문 교사’라는 느낌이 강하다. 거의 매일 수업의 절반 이상은 문법 설명으로 채워지고,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머릿속이 문법으로 꽉 차서 질릴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처럼 문법 없이 대화 중심으로 수업을 하는 날은 정말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다.


몰타대학은 유럽권에 속한 학교다 보니 아프리카, 중동, 유럽, 그리고 아시아권 학생들까지 전 세계 다양한 학생들이 이곳에서 어학연수를 한다. 국적별로 언어 습득 방식도 다르고, 수업 태도 역시 제각각이다.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학생, 매일 지각하는 학생도 있고, 그런 모습은 몰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몰타의 국기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학생이 한 명 있다. 튀르키예에서 온 '글렌담'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다. 대략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이 학생은 거의 매일 한 시간씩 늦게 수업에 들어온다. 그리고 수업 시간 내내 케빈에게 질문을 쏟아붓는다. 문제는 질문이 영어 반, 티르키예어 반으로 섞여 있다는 것. 옆에서 듣고 있으면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케빈은 단 한 번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낸 적이 없다. 매번 정성껏 대답해 주고,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진정한 ‘교사의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케빈은 몰타 현지인이다. 키가 크거나 눈에 띄게 큰 체격은 아니라서 동양인들과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다. 얼굴만 보면 유럽인이지만, 체구는 동양인에게 익숙한 모습에 가까워서 그런지 대면할 때도 부담 없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케빈은 ‘좋은 교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열정, 성실함, 인내심. 그 모든 것을 그는 매 수업에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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