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고,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집주인과의 문제로 또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사하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이 먼 타국 몰타에서 연달아 두 번이나 이사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은 콜롬비아 출신의 아벨미, 칠레 출신의 알바로와 함께 지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의 성격과 태도도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되었다.
첫인상으로는 아벨미가 더 친절하게 다가왔다. 영어가 서툰 나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었고, 내가 못 알아들어도 반복해서 설명해 주는 참 친절한 친구였다.
반면 알바로는 다소 소극적이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듯한 모습이라 처음에는 다가가기 어려웠다.
하루는 내 방에 책상이 있었지만 의자가 없어 당분간 식탁 의자를 쓰려고 했는데, 전날까지만 해도 네 개였던 의자가 어느새 세 개로 줄어 있었다.
하우스메이트가 셋인데, 내가 혼자서 의자를 방으로 옮겨 쓰는 건 조금 눈치가 보여 그냥 책상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오후가 되어 집주인이 책상용 의자를 따로 가져다주자, 알바로가 자기 방에서 식탁 의자 하나를 다시 가져와 놓았다.
즉, 처음부터 식탁 의자 하나는 알바로가 방으로 가져가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차피 알바로가 이 집에 먼저 살고 있었고, 나는 이제 막 입주한 입장이었기에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웃어넘길 수밖에.
며칠이 지나고 나니, 첫인상이 점점 더 진해지는 기분이었다.
알바로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도 영어를 잘하지 못해 어학원 초급반에서 수업을 듣고 있고, 나와 대화하는 데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도 사실 깊은 대화는 어려운 수준이라 “나도 그렇게 영어 잘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해주었다.
아벨미는 호텔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다.
아벨미는 주 6일 일하는 워커홀릭에 가까웠다.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주간근무와 야간근무를 교차로 호텔에 나가고 있었고, 내가 구체적으로 어느 호텔에서 일하는지 묻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일부러 묻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말해주길 기다렸다.
결국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아벨미는 자기가 일하는 호텔에 나를 초대해 주었고, 그제야 어디서 일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성격도 호의적이었지만, 동시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몰타는 유럽의 지중해 한가운데에 위치한 섬나라라 그런지,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시내를 걷다 보면 방글라데시, 인도 상점들이 즐비하고, 네팔이나 필리핀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상점에 가면 나를 보고 “중국인이냐?”라고 묻는 경우도 많았고, 문신이 많은 몰타 사람들 중에는 일본어 문신을 한 사람들도 꽤 보였다. 왠지 일본 문화에 대한 동경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학교 식당에서 나를 단번에 한국인으로 알아본 필리핀 직원도 있었다.
치킨이나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항상 접시에 넘치도록 담아주었고, 내가 “필리핀 어디 출신이냐”라고 물으며 마닐라, 세부, 바기오 같은 지명을 말하자 그 친구도 내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하루는 아벨미가 밤 근무를 나가고, 집에는 나와 알바로만 남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알바로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궁금한 것이 많은지 나와, 내 가족 이야기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나는 핸드폰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해 주었고, 그는 매우 기뻐했다.
그러다 그가 내게 “자신은 45살인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주었다.
왜 결혼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괜히 실례가 될까 싶어 쉽게 묻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결국 용기를 내어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알바로는 “이건 아벨미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나에게만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처럼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용기 자체가 놀라웠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게이’라고 밝히는 게 쉽지 않은 문화니까.
나는 알바로에게 “칠레에서는 그런 걸 밝히는 게 어렵지 않으냐”라고 물었고, 그는 “가족 모두 알고 있고, 특별히 거부하는 문화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난 뒤 나서 그가 “걱정하지 마라, 당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라고 말했는데,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내가 스스로를 지킬 능력도 없을 나이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관계로 발전할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의 말이 웃기기도 하고, 나름대로 배려였겠지만 약간은 엉뚱한 위로 같았다.
그날 이후 알바로와의 대화는 더욱 깊어졌고, 나는 그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경험이지만, 이곳 몰타에서는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서로를 이해해가고 있는 셈이다.
그의 고백은 나에게 충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나는 그를 평가하거나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삶을 지켜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