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몰타에 오기 전, 나는 이탈리아 로마와 나폴리, 시칠리아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제대로 된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몰타는 유럽 쉥겐조약 국가이기에 비자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평소 한국에서 10일짜리 패키지 투어보다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한국인 친구들은 이미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파리, 런던 같은 도시들을 다녀왔다고 했다. 나도 여러 번 고민하다가 마침 저비용 항공사에서 프랑스 툴루즈까지 편도 13유로짜리 항공권을 발견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들을 중심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툴루즈를 시작으로 카르카손, 나르본, 세테, 아비뇽, 아를, 마르세유, 니스, 모나코를 거쳐, 여행 중 우연히 알게 된 칸 국제영화제를 보기 위해 다시 경로를 수정해 칸까지 들르기로 했다. 유럽 기차 시스템은 매우 잘 갖춰져 있어서 대부분 도시를 도보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편리했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나이와 체력의 한계를 실감하게 됐다. 하루 종일 걷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문제도 생겼다.
여행 내내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덕분에 우산은 필요 없었지만, 그 대신 강한 햇볕에 오래 노출되어 얼굴에 부스럼이 생기기 시작했다. 준비해 간 로션을 발라도 효과는 없었고, 결국 피부 트러블이 점점 심해졌다. 여행 마지막 구간인 마르세유에 도착했을 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따갑고 붉게 부어올랐다.
결국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약국을 찾아갔다. 아직 오전 9시도 안 된 시간인데도 약국에는 10명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약사는 3명, 모두 히잡을 쓴 이슬람 여성들이었고 손님과 상담 후 약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영어 상담이 가능한지 물었고, 다행히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내 얼굴을 보여주며 “알러지 때문에 부스럼이 났고, 눈도 따갑다”라고 설명하자, 약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튜브 하나를 건넸다. 중지 손가락만 한 크기의, 작고 귀여운 상자였다.
하지만 상자를 열어보니… 그건 연고가 아니라 썬크림이었다. UV 차단 지수가 30으로 적혀 있었다. 당황한 나는 “나는 치료용 연고, Ointment가 필요하다”라고 다시 설명했다. 약사는 “이 썬크림에는 알러지를 진정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다”라고 말했고, 나는 “정말이냐”라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Yes”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약사라는 전문가가 그렇게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외국에서 언어로 항의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었다. 결국 10유로를 내고 약을 받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연고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알러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증상은 더 심해졌고, 나는 여행 일정을 포기할까 말까 고민에 빠졌다. 이미 예약해 둔 숙소와 항공권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도 없었기에 참고 견디기로 했다.
결국 나는 여행 내내 고통을 참아야 했고, 10유로를 주고도 아무 소용없는 썬크림 하나만 얻은 셈이 되었다. 마르세유 공항에서 몰타로 되돌아갈 때, 다시 약국에 들러 항의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조차도 힘들고 시간 낭비일 것 같아 포기했다.
몰타와 프랑스를 다녀보니, 외국에서 살아가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언어의 장벽, 정보 부족, 타인의 책임감 부족까지 겹치면, 이렇게 간단한 약 하나 구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나중에 찾아보니 알러지에는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약사는 왜 썬크림을 권했을까? 그녀가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면 재고가 많은 썬크림을 외국인에게 떠넘기려 했던 걸까?
집에 와서 썬크림을 다시 보니 UV 지수가 30이었다. 요즘은 대부분 50 이상을 사용한다는데, 아마도 30짜리는 잘 팔리지 않는 재고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괜히 내가 바보 같고 속은 느낌이 들었다.
여행 마지막 날, 숙소 침대에 누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그 집이라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 몰타였다. 내가 몰타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뜻이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제 나도 몰타인 다 됐네.’
앞으로는 의사든 약사든, 전문가의 말이라고 무조건 믿지 않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상식에 어긋나면 강하게 말하고, 정당하게 요구할 것이다.
낯선 땅에서는 나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전문가가 되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