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벌써 6월이다. 몰타에 온 지도 4개월이 지났고, 어느덧 5개월째에 접어들었다.
6월의 첫날이자 토요일.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어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서 학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아무도 답장이 없었다.
오전 11시가 지나서야 한 친구가 카톡으로 “토요일이라 늦잠 잤다”라고 답했고, 랭귀지스쿨 선배는 오늘 배우자와 함께 교외로 나가기로 했다며 수영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기숙사에 있는 일본인 친구 아카리와 칸타에게 연락해 보니, 아카리는 방금 일어났다며 내가 제안한 맥주공장 방문에 “맥주는 별로 안 좋아한다”라고 했고, 칸타는 가보고는 싶지만 이미 일본 친구 하루와 함께 고조섬에 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마땅히 함께 갈 사람이 없었다. 혼자 맥주공장을 갈까 고민도 했지만, 체험 후 시음하는 맥주를 혼자 마셔야 한다는 생각에 맛이 반감될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결국 방 안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청했다.
오후 2시쯤 눈을 떴다. 황금 같은 주말인데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웠다. 지역 지도를 살펴보다가,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쓰리시티(Three Cities)가 눈에 들어왔다. 발레타와 가까우면서도 바다 건너편에 위치한 이 도시가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있던 플랫메이트, 칠레인 알바로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해 보았지만 약속이 있다며 거절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예전에 알바로와 발레타를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 대한 흥미가 없는 듯했고, 나 역시 그와 함께한 시간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이번 여행도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쓰리시티는 지도상으로 가까워 보였지만, 구글 지도를 보니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정류장도 20개가 넘었다. 결국 잘못 내려서 원래 가고자 했던 Saint Vittorie가 아닌, 그 건너편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관광을 하기엔 충분히 매력적인 장소였다. 많은 관광객이 몰리진 않았지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성 망루가 있었고, 그곳에서 발레타와 인근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던 중, 두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아이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아이가 신기해하던 셀카봉을 만져보게 해 주었고, 자연스레 부모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불가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나도 언젠가 불가리아에 가보고 싶다고 하자, 수도보다는 교외가 훨씬 좋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원래 생각하고 있던 이탈리아 베니스보다 불가리아가 더 끌리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가면 불가리아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찾아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후 5시 반에 집을 나와 약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도착한 쓰리시티는, 무려 세 시간 가까이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았다. 전쟁박물관이나 성당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후 6시에 문을 닫는 탓에 내부 관람은 하지 못했다.
몰타는 적도와 가까워서 낮에는 햇볕이 너무 강렬하다. 그런데 업무시간은 여전히 6시까지다. 관광지 운영 시간도 여름에 맞춰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9시가 가까운 시각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쓰리시티에 유입되고 있었고, 해는 이제 막 지려 하고 있었다. 이곳의 저녁은 참으로 길었다.
배가 고팠지만, 혼자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 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이 어쩐지 궁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길거리 피자 가게를 지나치며 고민만 하다가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버스 시간은 평소보다 잘 맞아떨어졌고, 수월하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부엌에 알바로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이라 기쁜 마음에 “하이!”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븐에서 피자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이거 네가 만든 거야?”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나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오븐에서 피자를 꺼내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지나쳐 사라지는 알바로의 뒷모습을 보며 괜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전, 나는 당면을 활용해 잡채를 만들어 플랫메이트들과 나눠 먹었다. 한국 음식은 맵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친구들에게 “걱정하지 마, 맵지 않게 만들었어”라고 설명하며,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양도 넉넉히 준비했다.
친구들은 “정말 맛있다”며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먹었고, 나는 그 반응에 마음이 참 뿌듯했다. 그런데, 그런 정성과 마음을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로는 기본적인 "먹어볼래?"라는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은 서운했다. 같은 집에 살며 식탁을 함께 나누는 사이인데,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해줬으니, 그도 나에게 똑같이 해주겠지”라는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관계를 대하는 방식은 다르고, 기대는 결국 실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오늘의 혼자 떠난 쓰리시티 여행처럼, 관계 속에서도 때로는 혼자인 것이 편할 때가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의 끝에 다시 한번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