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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계획에 없던 도전, 자만의 끝에서 마주한 현실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몰타에 온 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랭귀지 스쿨 생활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고, 주위 친구들은 하나둘 레벨업을 준비하거나 시험을 본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왔다.


예전, 나와 같은 반이었던 한국인 소정이가 시험을 보고 다른 반으로 옮겼을 때, 나도 잠시 레벨업을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 컸고, 그 시기에는 수업에 대한 집중도 잠깐 흔들렸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우리 반 선생님 케빈의 수업 방식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냥 이대로 쭉 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수업이 끝나고, 케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무 오래 내 반에 머무른 것 같다"며, 레벨업 테스트를 한 번 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수업이 만족스러워요. 계속 케빈 선생님 반에서 계속 배우고 싶어요."
덧붙여, "제가 대학생도 아니고, 이 과정을 수료해도 당장 어디에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제게 중요한 건 단지 레벨이 아니라, 지금 이 과정 그 자체예요." 라며 이유를 설명했다. 케빈은 그저 웃으며 나를 바라봤고,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됐다.


수업을 마친 후, 평소처럼 사무실 앞을 지나는데 카렌이 다른 학생들과 상담 중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중, 두 명의 여학생이 오늘 레벨업 시험을 본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나도 그냥 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결국 그들 뒤를 따라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강의실, 긴장된 공기. 나 역시 시험을 치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카렌이 시험지를 건네주고는, 만약 오늘 시험을 안 보면 다음 기회는 다음 주 목요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준비는 전혀 안 되었지만, ‘중하위권 레벨인데 얼마나 어렵겠어?’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피어오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시험지를 넘기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첫 장엔 간단한 2~3지 선택형 문제가 열 문항 정도 있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전부 주관식이었다. 마지막 다섯 페이지는 독해 문제와 작문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었다.

첫 페이지 정도야 감으로 풀 수 있었지만, 단답형 주관식부터 갑자기 암담해졌다. 분명 수업 시간에 다뤘던 문법이긴 했지만, 정확한 시제를 맞춰 문장을 만드는 건 너무도 어려웠다. 단어 배열 문제는 특히 감이 오질 않았고, 속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 시험을 포기하고 카렌에게 “다음에 다시 준비해서 보겠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채점을 해야 할 케빈에게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자 모니터

어찌어찌해서 답안을 채워나가긴 했지만, 장문 쓰기까지 다 마쳤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훌쩍 넘은 상태였다. 아무리 케빈이 나를 예쁘게 봐줘도, 이 시험에서 레벨업에 필요한 점수를 받긴 어려울 것 같았다.

내심, 이렇게 어렵게 중하위권 레벨업 시험을 구성해 놓은 주최 측이 너무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시험을 만든 사람이 나도 아니고, 어쨌든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카렌에게 시험지를 제출하면서, "시험 너무 어렵네요"라고 말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결과는 내일 알려줄게요.”였다.


돌아가는 길, 자포자기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일 케빈에게 "그냥 계속 지금 반에서 수업 듣고 싶어요"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이미 뻔한 것 같았고, 시험 직전 괜히 객기로 “내가 시험 보면 100점 맞아서 두 단계 올라가야지!”라고 장난스레 말했던 게 부끄럽기만 했다. 차라리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시험이라는 걸 보며, 무계획과 자만감이 얼마나 허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새삼 깨닫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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