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지금 나는 칠레 출신의 알바로와 콜롬비아 출신의 아벨미와 함께 살고 있다.
아벨미는 현재 호텔 리셉션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함께 생활해 보니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자기가 받은 배려에 대해 항상 감사해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되돌려주는 성격이다.
며칠 전에는 아벨미가 나를 자신의 생일 파티에 초대해 주었다. 처음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참여했지만, 그의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후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활 전반을 공유하게 되었고,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나 실수에 대해 조심스럽게 알려주기도 했다. 의견이 다르거나 생활 방식이 다를 때에도, 아벨미는 그것이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어 늘 내게 의견을 묻고 함께 조율하려고 했다.
하지만 알바로는 말 그대로 정반대의 사람이다.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마치 투명 인간처럼 지낸다. 자신의 생활을 드러내기 싫은 건지, 아니면 플랫메이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은 몰타의 공휴일이자 금요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아벨미는 아침 일찍 출근했다. 나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거실 테이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영어 예습을 하고 있었는데, 9시 30분이 가까워져도 알바로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이번 주말은 3일 연휴라 집에만 있기 싫은 마음에 친구들을 모아 맥주 공장 체험과 Gzira 지역의 바닷가 수영을 계획했다. 랭귀지 스쿨 친구 5명과 함께 오전엔 맥주 공장, 오후엔 해변 수영을 가기로 결정했다.
퍼블릭 수영장과는 다른 생생한 파도와 염분, 그리고 바닷물 맛까지 느낀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같이 간 일본인 대학생 아오이가 맥주를 마시자는 제안을 했지만, 62세의 길버트와 나는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피곤함이 앞섰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알바로는 이미 집에 와 있었다. 그런데 어디 다녀왔냐는 말도, 인사도 없이 묵묵히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수영복을 건조대에 널어놓은 걸 보니 그도 나처럼 오늘 바다에 다녀온 듯했다.
평소에도 질문을 하면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그였기에, 오늘도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뭘 물어봤을 때 “당신이 내 아버지인가요?”라고 대꾸했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먼저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저녁 무렵, 아벨미가 “나는 바닥을 청소할 테니 너는 물걸레 청소를 도와줄 수 있겠냐”라고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흔쾌히 도와주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청소를 시작하려 보니, 바닥은 먼지투성이였고 청소를 하던 중 아벨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급한 약속이 생긴 듯했다.
결국 혼자서 집기의 위치를 옮기고 먼지를 청소한 후, 물걸레 청소까지 하기 시작했다. 저녁 7시 가까운 시간이라 더운 날씨에 땀이 줄줄 났다. 청소를 하면서 집기를 옮기는 소음도 있었음에도, 방 안에 있던 알바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실 그에게 함께 청소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끼리는 어느 정도의 공동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 뻔히 보여서, 그냥 소리를 듣고도 반응이 없으면 그것대로 두자고 마음을 접었다.
청소 후엔 땀이 나서 급히 샤워를 해야 했다. 샤워 후 화장실 청소까지 마치고 나니, 몸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거실에서 손부채질을 하며 잠시 몸을 식히고 있었는데, 알바로가 방에서 나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요리한 음식을 방으로 가져가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갔다.
화장실에는 물걸레가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그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무심한 건지,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이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문을 닫고 방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괜히 더 기분이 상했다. 마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자유롭고 아무에게도 의무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역시 이방인으로서 몰타에 와 있는 사람일 텐데, 타국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아직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따라 그의 냉담한 태도가 유난히 더 거슬렸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남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왜 그는 아직 모를까. 40대라는 그의 나이도 오늘따라 전혀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