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두브로브니크를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연착되었지만, 여전히 낮 시간에 나폴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지리를 몰라 헤매야 할 걱정은 없었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비였다.
나폴리의 보도블록은 돌이나 작은 대리석 조각들로 되어 있어, 빗물이 금세 고였다. 조금만 걸어도 운동화 앞부분이 젖기 시작했다. 운동화가 한 켤레뿐이라, 젖으면 이후 여행이 곤란해질 상황. 우산을 들고 짐을 메고 조심조심 걸었지만,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구글 지도를 보며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약 1km. 우산과 짐을 메고, 빗속을 걸어가자 금세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도 이번 여행 중 가장 비싼 숙소에 예약한 만큼 마지막 나날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숙소에 도착해 보니, 입구에는 작은 팻말만 달랑 걸려 있을 뿐, 오피스로 보이는 곳이 없었다. 안쪽에서 불이 켜진 작은 사무실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주소가 적힌 코팅 안내지를 보여주며 "열쇠는 다른 사무실에서 받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제야 예약 확인서를 다시 살펴보니, 체크인 주소가 따로 적혀 있었다. 사전 예약 당시에는 그런 안내가 보이지 않았는데, 예약 후 확인서에만 표시되어 있었다. 내 부주의였지만, 사전에 분명한 안내가 없었던 것도 분명했다.
비 오는 날, 짐을 메고 다시 1.5km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억울함과 피로가 밀려왔다. 그래도 방법이 없으니 다시 길을 나섰다. 걷는 동안 ‘짐이라도 놓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힘들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사무실은 대로변에 위치한, 작은 숙소를 운영하기에는 과하게 큰 공간이었다. 중앙 로비와 좌측 고객 접수실, 우측 관리자 사무실이 나뉘어 있었다.
공항에서 나폴리역까지, 역에서 이곳까지 계속 걸은 끝에 저녁 7시가 다 되어 있었다. 빨리 열쇠를 받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접수실 여직원은 호텔 웹사이트에 접속하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핸드폰을 빌려 웹사이트를 열어주며 개인정보를 입력하라고 했다. 이름, 생년월일, 국적 등 입력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권 사진 촬영까지 요구했고, 심지어 1인 투숙인데 2인실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여권 사진을 두 번 입력해야 했다. 에러까지 반복되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결국 여직원에게 "이건 당신이 해야 할 일 아니냐"라고 물었지만, "여기는 고객이 직접 해야 한다"는 차가운 답만 돌아왔다.
그 와중에 여권을 보고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차린 직원은, 옆 동료와 이탈리아어로 불쾌한 듯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그래도 참고 마지막까지 입력을 마쳤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터졌다. 입력을 마치자 뜬 결제창. 숙박 보증금과 도시세 명목으로 246유로를 결제하라는 것이었다. 도시세는 이해할 수 있어도, 보증금이 200유로를 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보증금은 체크아웃 후 영업일 기준 30일이 지나야 환불된다고 했다.
이런 중요한 조건은 예약 사이트에서도 본 적이 없어 근거를 요구했지만, 여직원은 "한글로는 안내되지 않는다"며 얼버무렸다.
보증금 없이 숙소 이용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반복되었고,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숨겨둔 정책을 겨우 찾아 보여줬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일단 소파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 오토바이를 타고 온 이탈리아 커플 두 쌍도 같은 문제로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았다. 그들과 이야기해 보니, 그들 역시 동일한 이유로 항의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힘을 합치기로 했다. 결국 해당 업소를 경찰에 신고할 것을 결정하고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나는 112에 직접 전화를 걸어 그들에게 넘겨주었지만,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경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호텔 측은 끝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보증금을 못 내면 방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숙소 이용을 포기하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책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고압적인 태도로 우리의 불만을 무시했다. 한국에서 먼 나라까지 와서 겪는 부당한 대우에 나폴리 구단의 한국 축구선수 김민재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한국인을 배려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숙소 이용을 포기하면서, 호텔 예약 사이트에 최하 평점을 남기고 부당한 운영 방식을 폭로할 것을 다짐했다. 호텔이 이런 식으로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계속하는 게 너무나도 분했다.
힘든 하루였다. 다시 짐을 챙겨, 다른 숙소를 찾아 빗속을 걸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