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폼페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처럼 오늘은 일찍 눈이 떠졌다. 여행을 준비하던 그 순간부터 가장 기대했던 일정이었기에, 나는 아침 첫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나폴리 중앙역으로 향했다.
기차는 09시 10분 출발. 혹시나 모를 변수에 대비해 여유 있게 도착했지만, 전광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가 예약한 열차는 보이지 않았다. 출발 10분 전, 불안한 마음에 안내소로 달려가 물어보니, 내 기차는 지하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전광판엔 위치 안내 위치가 없었고, 그걸 내가 몰랐던 건지 애초에 없었던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하로 뛰어가 겨우 도착했지만, 내 눈앞에 선 열차는 뭔가 이상했다. 시간은 맞았지만 열차 번호가 다르다. 이탈리아는 워낙 연착이 잦고, 다른 나라에서 넘어오는 열차들도 많다 보니 기차 시스템 자체가 복잡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걸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내 기차표를 보여주며 승무원에게 묻자 고개를 저으며 “다음 열차를 타라”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 열차 역시 번호가 맞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탑승했고, 플랫폼에 혼자 남은 나.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시 누군가에게 묻자 열차 번호는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어쩌면 아까 그 열차가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결국 나는 기차를 놓쳤고, 불안한 마음에 새 기차표를 사야 했다. 부정 탑승으로 벌금이 수십 배 청구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냥 탈 수가 없었다.
사실, 억울했다. 미리 예약한 표가 있었음에도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해, 또다시 표를 사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기차표 하단에 적힌 Valid time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정 시간 내의 열차는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괜히 표를 다시 산 것이었다.
폼페이에 도착했을 땐 이미 지쳐 있었다. 연계버스를 기다리며 뒤에 서 있던 뉴질랜드 노부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남편은 등산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자연스레 버스 앞자리를 양보했다.
폼페이 유적지에 들어서자마자, 역사의 숨결이 피부에 와닿았다. 2천 년 전, 화산재에 의해 단숨에 멈춰버린 도시. 베수비오 화산의 갑작스러운 분화로 인해 하루아침에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혀버린 그곳.
숨이 멎은 듯한 시간, 굳어진 채로 발굴된 사람들의 모습은 고통과 당혹의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세 시간 넘게 걸으며 유적지를 둘러봤지만, 아직도 발굴 중인 지역들이 많았다. 폼페이는 그 자체로 거대한 박물관 같았다.
정오를 지나며 더위가 심해졌다. 뒷목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며 결국 숙소로 돌아왔다. 오후 3시가 넘었고, 배도 고팠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 애매하게 다가와 숙소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간단히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샌드위치 가격을 여직원에게 물으니 1.5유로라고 했고, 카푸치노를 주문하자 남직원이 총 10유로라고 말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왜 10유로냐"라고 묻자, 그는 커피 5유로, 샌드위치 5유로라고 했다.
"여직원은 아까 1.5유로라고 했는데 왜 당신은 다르게 말하느냐"라고 따졌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관광객이라고, 동양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운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화가 났다. 아무 말 없이 주문을 취소하고 나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리뷰 하나 검색해 보면 가격이 다 나오는데, 아직도 관광객을 상대로 이런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나폴리는 분명 매력적인 도시이지만, 이런 상술은 그 이미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옆 가게에 들어가 같은 메뉴를 시켰다. 가격은 3유로.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주었다.
감사 인사를 건넸지만, 마음 한켠에 남은 찜찜함 때문에 표정은 억지춘향 같았다.
하지만 그 직원은 계속해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다정하게 인사했고, 그 모습에 조금씩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도 한국에서 외국인을 처음 보면 신기해서 곁눈질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그리 보일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더위를 식히고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저녁 시간이 다가왔고, 이번엔 확실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시푸드를 시켰고, 맥주와 함께 먹는 식사는 하루의 피로를 싹 씻어주었다. 싱싱한 새우와 생선은 나폴리의 바다 맛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폼페이의 감동과 카페에서의 불쾌함, 시푸드 한 접시에 담긴 위로...
룸메이트 아벨미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행에는 불행도 포함되어 있어.”
그 말이 오늘 하루를 완성시켰다.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는 몰타에서의 일상을 나에게 나누어주었다.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