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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킹가위 Jun 18. 2024

무허가

1교시 수업을 하던 중 교실 책장에 묻혀 있던 졸업생들의 문집을 발견했다. 20세기에는 했다고 전해지지만 21세기, 더군다나 남고에서는 매우 찾기 힘든 전설적인 장르다. 전설 속 영웅들은 이미 졸업을 한 상태라 이름을 봐도 실체를 알 수는 없었다. 어벤저스의 영웅들처럼 히어로 마스크를 쓰고 있을지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작품들을 살펴본다.

항상 죄송하고
항상 미안해요
나도 아들은 처음이라
아직 서툴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냥 죄송해요
그냥 미안해요
그리고
그냥 사랑해요

스파이더맨, <엄마에게>


짧은 문장 안에 진심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언제나 그렇듯 진심을 담은 글은 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아주미니를 만났다

인사와 동시에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올해 고등학교 들어가니?

아뇨, 올해 2학년 돼요
어머, 그러니? 세월이 참 빠르구나

나는 이제야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아주머니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어느날, 5살 때 이사왔던 꼬마와 엄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씩씩하게 다녀 이제 너도 초등학생이잖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월이 참 빠르구나

블랙 팬서, <세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같다. 어느 하나 편애하지 않고 묵묵히 흘러간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니 남다른 통찰력이 부럽다.


존버를
해야 할까
하니 걱정스러워

매도할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사람들도, 이 사람들도
이 섹타 경제 분야의 종목
떨어진다
지저귑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전문가들은
곧 오른다고 무조건 오른다고
매도하면 후회한다 재촉합니다

아이언맨, <망설이는 길>
김소월의 <가는 길>을 변주하여


저마다 떠드는 뭇사람들의 말에 갈등하는 미래의 투자자가 보인다. 곧 자신만의 뚜렷한 안목을 갖게 되리라.


꿈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 테요
목표가 좌절되어 버린 날
나는 비로소 꿈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혼란스러웠던 날
천지에 꿈이란 자취는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나의 기대 세운 게 무너졌으니
희망이 지고 말면 그뿐 나의 꿈은 다 사라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우울해 방황합네다
꿈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테요
가깝지만 멀리서 빛나는 꿈을

캡틴 아메리카, <꿈이 피기까지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변주하여

꿈꾸는 들의 노래는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학교를 떠나버린 영웅들에게 어머니는 건강하신지, 20대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아직도 존버(?)중인지, 꿈이라는 건 마큼 찬란한 슬픔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은 하루다.


숨어 있는 글들이 너무 아까워 허락 없이 살려냈습니다.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작품 주인께서 만약 보고 불편하셨다면 알려주세요. 바로 삭제하고 사과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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