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여자친구가 한 유튜브 영상 링크를 보내왔다. 바로 복제견 티코에 대한 영상이었다. 반려견을 너무 사랑하던 한 반려인이, 반려견이 뜻하지 않게 강아지 별로 떠나자 그 DNA를 이용하여 세상을 떠난 반려견과 같은 DNA를 가진 두 마리의 강아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반려인은 강아지들에게 티코라는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영상을 본 후에 나는 핸드폰을 덮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옳고 그름과, 도덕과 비도덕과, 사랑과 어긋난 애정이 내 머릿속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창 밖의 날씨는 예보와 다르게 바람이 매서워 몹시 추웠다.
그 반려인이 왜 복제견을 만들었는지는 심정적으로는 백번 천 번 이해했다. 마음 깊이 사랑하던 가족이자 반려견을 잃은 슬픔은 이 세상 그 어떤 반려인에게 물어봐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펫로스 증후군으로 식음을 전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는 언뜻 이상적인 대답으로 보일 수 있다. 나 역시도 우리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만큼 슬픔과 고통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동시에 객관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반려인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다고,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사랑하는 내 반려동물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같은 외모, 같은 성격, 같은 부모와 심지어 같은 DNA를 가진 그 어떤 존재가 있더라도 그 아이는 다른 아이다. 내가 펫로스 증후군으로 고통받는다 하여도 내 아이를 같은 DNA를 가진 복제견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그 아이를 도구화하는 것이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므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 세상이 떠났다고 그 가족의 DNA로 새로운 부모형제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칸트가 말하는 목적으로 대하는 대상이 다만 인간이 아닌 반려동물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반려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 사람의 고통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사람의 행동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한동안 침울해하자 성질 더러운 고양이 녀석이 나에게로 와 머리를 부딪쳐 왔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나는 네가 내 곁을 떠나더라도 너를 대체하지 않을 거야.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이고, 언제나 내 마음속에 묻혀 있을 거야.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골골거리는 소리만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