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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정 Jun 17. 2021

불온한 욕망의 게임, <엘르>

남녀의 비명 혹은 신음소리가 파열음처럼 새어나오는 어둠과 그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 얼굴로 시작하는 <엘르>는, 인간의 불온한 욕망에 관한 영화다.          

          

대낮 집에서 강간당한 미셀은 복면 쓴 괴한이 사라지자 태연하게 깨진 그릇들을 치우고 찢어진 옷을 버리고 목욕을 하고 방문한 아들과 일상적 대화를 하며 저녁을 먹는다. 강간범이 스토킹 하는 문자를 보내며 집 주변을 맴돌자 성실한 생활인의 얼굴로 장 보듯 도끼와 후추 스프레이를 사고 망치를 손에 들고 잠든다. 회사에서도 자신을 게임 속 강간당하는 캐릭터로 합성한 메일이 도착하자 총을 구해 쏘는 연습을 하고 범인을 직접 잡아 처리한다. 미셀에게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내가 해결해야할 미친 놈”이며, 불온한 욕망에서 배태되는 ‘그런 일’들은 일상에서 늘 직접 대처해온 “내 전공” 이다.          

           

미셀은 또한 강간범의 머리를 잔혹하게 내리치는 상상을 하면서 묘하게 미소 짓고 이웃남자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며 자위하고 남자와 자고 싶어서 가장 친한 친구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다. 강간범의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황이 주는 긴장을 은근히 즐기는 듯 보이고, 이웃남자가 자신의 강간범임을 알고 난 후 그와 더욱 친밀해진다.                     


10살 때 평범한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사이코패스로 돌변한 광경을 목격했던 미셀은 게임회사 오너가 되어 직원에게 ‘플레이어가 끈적하고 따뜻한 피를 느낄 수 있는’ 게임을 주문한다. 미셀에게 불온한 욕망은 트라우마 혹은 처단해야 할 적이 아니라 사회적 성공과 부를 가져다주는 원질료 나아가 인생이라는 비즈니스의 파트너와 더 가까워 보인다. 미셀은 인간의 삶이 불온한 욕망과 주도적으로 거래해온 방식을 전복시킨다. <엘르>는 불온한 욕망의 새로운 주체, 미셀에 관한 영화다.                     


미셀은 불온한 욕망이, 어둠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집고양이 같은 존재라는 사실과,  사회적 금기에 의해 인간 안에 폭탄처럼 봉인된 본능이라는 사실과, 화해한 인물이다. 미셀은 그래서 불온한 욕망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미셀은 자신의 인생을, 불온한 욕망의 치명적 칼날이 자신을 찌를지 타인을 찌를지 투쟁하는 전쟁터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미셀은 대신 목숨이라는 판돈을 걸고 게임을 한다. 미셀은 인간을 사수할 것인가 괴물이 될 것인가로 집약되는 기존 게임판 대신 불온한 자신과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라는 새로운 게임판을 벌린다. 그리고 그 게임판에서 가해자들-강간범인 이웃남자는 물론, 아버지 혹은 강간범을 살해하는 아들까지-을 욕망의 대리적 주체로 활용하고 자신은 피해자를 연기함으로서 승리한다.                     


변태성욕자 이웃남자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함께 지하실로 내려간 미셀이 지하실에서 내지르는 비명은 고통이자 동시에 쾌락이다. 미셀은 모호한 표정으로, 타인 속에 탑재된 불온한 욕망의 방아쇠를 당겨 현실로 발화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되어 가해자가 쏜 욕망의 총알을 함께 맞는다. 미셀은 욕망의 대리적 주체인 얼티에고들을 통해 자신의 불온한 욕망을 안전하게 충족시키고 그를 통해 불온한 자신과 화해한다.                      


미셀은 불온한 욕망을 품었으나 불온한 욕망에 겁탈당하지 않는 영화 역사상 가장 주체적인 인물 중 하나다. 미셀은 생의 어두운 뒷골목에 위치한 불온한 욕망의 질곡에서 죄인처럼 노예처럼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대신 고양이처럼 욕망의 질곡을 깊게 응시하고 욕망의 온도를 차갑게 조절하여 생의 대낮 길목에서 욕망과의 밀회를 스스로 주체한다. <엘르>는 미셀을 통해,  인간이 불온한 욕망과 맺어 왔던 기존 역학관계를 역전시키고, 불온한 욕망과의 게임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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