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이즈 본>은, 제목을 충실히 따르자면 ‘하늘이 내린, 천상 스타’에 대한 영화다. 잭의 공연으로 시작하고 앨리의 노래로 끝나는 이 영화는 흔히 스타의 성장과 몰락을 성실하게 직조한, 스타의 세대교체에 대한 영화로 읽힌다. ‘스타커플의 비극적 사랑이야기’ 또는 ‘스타의 화려하고 어두운 두 가지 모습에 대한 이야기‘ 등도 이 영화를 읽는 익숙한 방식에 포함될 수 있다.
뮤직비디오로 음악이 완성되고 유튜브로 음악을 접하는 시대,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는 앨리다. 천상의 목소리, 열정적 무대매너는 물론 얼굴이 별루라는 핸디캡을 극복할 음악성까지 선천적으로 탑재한 앨리는 춤도 잘 추고 문화산업 시스템에도 잘 적응한다. 드렉바의 작은 무대를 일순간 매력적인 콘서트장으로 바꿀 만큼 스타성과 카리스마를 가진 앨리는 ‘전쟁터’로 표현되는 팝시장에서 훌륭한 군인이 될 자질과 근성을 갖춘 우리시대의 ‘천상 스타’다.
하지만 이 영화가 흔한 스타탄생 이야기로 주저앉지 않도록 공헌하는 인물은 잭이다. 잭은 벌써 네 번째 재생산되고 있는 이 스타탄생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탈색시킨다. 이 익숙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각색되는 지점이 바로 잭인 셈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잭은 인간적 연민과 함께 한마디로 ‘잭은 왜 저럴까?’라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잘 웃지만 슬퍼 보이고 음악과 무대에 열정적으로 심취하지만 공허해 보이고, 앨리가 ‘대체 어떻게 견디냐’고 물었던, ‘들이대고 도촬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화를 내지 않으며 항상 먼저 사과하지만 술과 약에 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 좋은 사람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무책임한 잭은, 얼굴은 늘 웃고 있지만 몸은 늘 울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시종일관, 사랑하는 앨리와 함께 있는 순간조차도 피곤해 보인다.
이 호기심에 대해 영화는 두 가지 단서를 던져준다. 하나는 잭의 불우했던 유년시절이다. 63살에 자신을 낳은 아버지는 평생 알콜중독자였고, 어머니는 18살에 자신을 낳다가 죽었으며 애리조나의 고향집은 호두밭으로 변해 돌아갈 곳이 없다. 노래로 고백했듯이 ‘홀로 남은 외톨이’인 그에게 음악은 유년기 치명적 결핍을 채워준 안식처이자 그가 유일하게 진심을 털어놓으며 소통하는 곳이다. 하지만 ‘밴드의 연주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자살시도를 술에 취한 아버지가 알아채지 못했던 13살 그 나이로 돌아가는 듯 보인다.
앨리와 결혼 후 처음으로 집 같은 집이 생기지만, 앨리가 일로 집을 비우면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잠들고 돈 받고 하는 공연은 재미없으며 태어날 때 안 들렸던 귀는 계속 이명이 들린다. 어른으로서의 삶 자체에 서툰 잭은 유명 프로듀서가 매니저 제안을 했다고 말하는 앨리의 얼굴에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크림치즈를 바른다.
또 하나의 단서는 잭의 예술가적 결벽증과 자존심, 예민한 자의식과 감수성이다.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로 들어서는 앨리에게 ‘당신 속을 까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진심을 말해야 해’ 라고 조언하고, 화려한 화장에 섹시한 의상을 입고 백댄서들과 춤추며 ‘왜 그런 엉덩이로 알짱거려’ 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앨리에게는 ‘내가 너를 망쳤어, 니가 부끄러워’라고 말한다. 기타 연주할 때 모습이 고독한 수도자를 연상시키는 잭은 음악은 물론 비즈니스라는 어른세계의 일상에서도 현실적 타협이 불가한, 생과 필연적으로 불화를 겪는, 뮤지션의 영혼을 가진 인물이다. 잭은 자기 안의 그리고 자기 밖의 세계와의 불화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술과 마약 곧 자신을 망치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들의 사랑은 앨리를 스타로 만들고 잭의 몰락을 독촉한다. 앨리의 상승과 잭의 하강은 정확히 일치하는 여정이며, 이 여정의 클라이막스는 그래미 시상식이다. 생중계되는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서 앨리는 신인상을 받고 잭은 술과 약에 취한 채 바지에 오줌을 산다.
‘잭은 왜 저럴까’와 ‘잭은 왜 자살했을까’는 결국 같은 질문이다. 영화는 ‘공허함을 채우려다 지치지 않니... 악착같이 버티는 게 힘들지 않니’ 등의 노래 말을 던져줄 뿐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잭은 약물중독 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수많은 뮤지션들을 영화 내내 호출한다.
그러므로 2018년 산 <스타 이즈 본>은 시종일관 ‘듣는 음악’을 소환하는 영화다. 보는 음악이 음악의 주류적 재현방식인 지금, 기타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공연이 가능한 잭은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 고유의 모습을 보여준다. 앨리 또한 연주와 노래, 가사에 집중하게 하고 라디오 스타의 매력과 가치를 복원하고 증명한다.
잭의 표현을 빌리자면 라디오 스타에게 음악은 오로지 ‘옥타브 내에서 12개 음이 반복되는 것이고 뮤지션은 그 음을 자기 식으로 들려주는 것’이며 가사는 그들의 영혼에서 새어나오는 고백이다. 그들은 문화산업 시스템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운영되기에 결코 엔터테이너가 될 수 없다. 이 영화는 우리 안에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던 듣는 음악, 라디오 스타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영화에서 잭은 죽고 앨리는 스타로 비상한다.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가 여전히 건재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앨리가 매력적인 순간 역시 오롯이 노래에만 열중할 때 즉 라디오 스타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때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라디오 스타, 듣는 음악에 바치는 헌사다. <스타 이즈 본(2018)>은 ‘비디오는 정말 라디오 스타를 죽였나?’ 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는 라디오 스타를 그리워하고 있다’ 라고 대답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