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마로나>는 개 마로나의 인생 이야기다. 마로나 인생의 테마는 사랑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사랑 밖에 몰랐던 마로나의 인생은 사랑하는 이들이 지어준 4개의 이름 곧 4개의 사랑 이야기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아홉’ 시절이다. 엄마는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를 ‘아홉’으로 불렀고, 강아지 가족들 사이에서 아홉은 ‘핥아주는 혀의 감촉’만으로도 행복했다. 생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귀속된 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아홉에게 엄마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친다. 아홉은 아버지에게 보내져 12분을 함께 한 후 아버지의 인간에 의해 거리로 쫓겨난다.
두 번째는 그녀가 ‘나의 인간’이라고 부른 첫 인간 마눌이 지어준 이름 ‘아나’ 시절이다. 인생에 아나와 마눌 오직 둘만 존재하던 이 시절, 아나는 사랑만으로 우주가 꽉 차는 기쁨과 환희를 체험한다. 그녀는 아나 시절을 온 몸과 마음으로 통과하면서 개의 행복이 ‘자는 동안 지켜 줄 인간을 갖는 것’임을 발견한다.
세 번째는 그녀의 두 번째 인간 이스트만이 지어준 이름, ‘사라’ 시절이다. 사라는 ‘이스트만 이라는 글자 하나하나 까지 사랑한다고’ 읊조리지만 그 말은 이미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편인 이스트만에게 온전히 가 닿지 못한다. 사라는 이스트만 옆에 있기 위해 그의 인간들에게 죽을 만큼 얻어맞고, 모욕당하고, 감금되고, 내쫓긴다. 이스트만을 사랑했기에 사라는 사랑의 대가를 기꺼이 겪어낸다.
네 번째는 그녀의 마지막 인간인 솔랑쥬가 지어준 이름. ‘마로나’ 시절이다. 세 번의 이별 후, ‘행복은 고통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 늙어버린 기분이 되어버린’ 그녀 앞에 어른의 집에 사느라 이런 저런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작은 인간, 솔랑쥬가 나타난다. 마로나는 솔랑쥬가 겨우 마련한 집안의 자리인 빨래바구니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들어온 후 그 집의 가족이 된다. 솔랑쥬가 아이에서 소녀가 되는 시간동안 마로나는 지쳐 보이는 싱글맘 엄마, ‘넌 군식구야’ 라며 대놓고 못 마땅해 하는 할아버지와도 함께 하는 일상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인간들의 동반자로 뿌리를 내린다.
‘지켜야 할 무언가, 쓰다듬는 손길만 있다면 뭐든 가능한’ 마로나에게 사랑은 ‘그 사람을 옆에 두는 것’, ‘옆에서 지켜 주는 것’, ‘그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마로나는 ‘나의 인간’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그들 옆을 떠난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하는 마로나의 사랑법은 그동안 우리가 많이 보아온 고전적 사랑법에 속한다.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의 익숙한 루트를 충실히 따라가는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오래된 어쩌면 진부한 사랑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랑이야기는 오히려 새롭고 신선하게 체험된다. 그 이유는 마로나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우선 사랑의 주체가 개다. 개로 태어난 마로나가 세상을 체험하고 교류하는 주된 도구는 감각, 감정이다. 냄새는 개의 이런 특수성이 상징적으로 응축된 지점으로, 마로나의 고백처럼 ‘좋은 후각은 많은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냄새, 인간 마음의 냄새를 맡는 것은 물론 행복과 불행까지도 냄새로 체험하는 마로나에게 사랑은 ‘내 인간의 냄새가 좋았다’로 시작되고 ‘나쁜 냄새, 녹슨 냄새, 썩은 낙엽 냄새, 마지막의 냄새가 난다’로 끝난다.
‘콧속을 마눌의 냄새로 채우자 그의 따듯함이 전해져’ 행복했던 마로나는, ‘소시지 냄새 나는 안개와 인간 목소리’로 긴 어둠과 허기를 걷어냈던 마로나는 ‘그들에게 슬픈 냄새가 나는 건 싫어서’ ‘마지막이야’ 라는 말에 ‘알아요’로 대답하며 ‘인간이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별에 잘 대처하기를 바라며’ 그들을 떠난다. 그 후 솔랑쥬 가족과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며 나이 들어가고 있던 마로나는 노란 몸의 좀 멋진 뇌를 가진 솔랑쥬의 마음이 자신 외에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냄새를 맡으며, 18살 이후 일만 하는 딸을 불쌍해하는 할아버지 마음과 생계를 지탱하는 숫자들에 짓눌려 붉은 머리카락을 피처럼 출렁거리는 솔랑쥬 엄마의 마음 냄새를 맡으며, 괴물의 검은 입속 같은 도심 거리를 달리다가 생과 결별한다.
개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야기이기도 한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 인생의 꽃 같은 순간들을, 마로나가 온몸으로 느끼는 원초적 감각, 마로나 마음에 출렁이는 예민하고 풍부한 감정들을 직접적으로 번역한 색과 형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아나 시절의 세계는 다정하고 따뜻한 마눌의 마음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구성된다. 자유로운 영혼의 붉은 피부의 마눌의 몸은 곡예사를 넘어 마법사처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면서 지구 끝까지 단숨에 내달리고 마눌의 품에 안겨 마로나도 하늘 위로 그네를 타며 나비처럼 새처럼 날아간다. 마눌과의 사랑이 베푼 ‘흔치 않는 큰 행복’은 마로나에게 우주까지 날아가는 체험 그리고 아름다운 행성들과 함께 비행하면서 우주의 일부가 되는 체험으로 가시화된다.
또한 사라 시절의 세계 곧 푸른색 피부에 단단한 몸을 가진 건축가 이스트만과의 세계는 푸른빛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직선의 세계다. 이스트만은 사려 깊고 어른스럽게 사라를 사랑하지만 사라 마음에 비친 세상 풍경은 무수한 선들로 질서화 되고 규격화된 세계, 동근 몸의 자신이 머물 공간이 거세된 차가운 세계다. 이 추상적이고 기호화된 세계에서 마로나의 꽃 같은 순간이 머무는 곳은 밤의 공원이다. 낮에는 일해야 하는 이스트만과 단 둘이서만 좋아하는 공돌이를 하는 유일한 세계인 밤의 공원은 어둠이 지운 인공의 선들 대신 부드럽고 생기 있게 펄럭이는 투명한 꽃과 나무들이 만개해 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사는 마로나의 세계는 정제되고 절제된 언어나 질서의 매끈한 외관으로 구성된 익숙한 인간세계의 풍경에 소속되지 않는다. 마로나의 세계는, 인생의 순간들이 신비스럽고 변화무쌍한 감각, 감정들로 녹아내리고 뒤엉키며 다이나믹하게 출렁이면서 색과 형상으로 떠다니는 이상한 세계다. 감각과 감정으로 직조된, 색과 형상으로 축조된 마로나의 세계는 사랑했던 이들을 위해 이미지로 쓴 러브레터와 가깝다.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가 차와 부딪쳐 죽기 직전,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인간’ 들과 함께 사랑으로 생과 호흡하고 그를 통해 꽃 같은 기억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 한마디로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라고 고백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