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은 언제나 빨갰다. 검은색 짙게 무르익은 씨와 뒤늦게 자라 여무지 못한 하얀 씨도 수박의 기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씨 없는 수박을 사 먹을 수 있게 됐다. 씨 없는 수박에 익숙해진 사람은 씨 있는 수박을 먹을 수 없다. 수박씨를 걸러내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고 씨를 걸러내는 동안에 수박을 먹을 수 없으므로 비경제적이다.
그래서 이젠 씨 없는 빨간 수박이 수박의 전형적인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늘 농장과 마켓을 같이 운영하는 곳에 들렸다가 노랑 씨 없는 수박을 사 왔다.
빨간 수박을 사려고 들렸지만 ‘ 씨 없는 노랑 수박’ 이란 타이틀의 강력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노랑 수박을 샀다. 물론 겉모양은 빨간 수박이나 노랑 수박이나 둘 다 비슷하다. 다만 노랑 수박은 겉 색깔이 다 익지 않은 빨간 수박 같다. 선명한 녹색이 없이 멍롱한 연두색이다.
달고 과즙 넘치는 건 빨강이나 노랑이나 똑같다. 하지만 노랑 수박의 식감은 빨강 식감보다 약간 더 부드러운 버터 느낌이 나는 것 같다. 아마 색깔의 차이 때문에 느끼는 맛의 차이 있을도 있다.
수박 살은 빨강이 될 수도 노랑이 될 수도 있다. 내 인생 삶에서 어떤 것이 항상 A였다고 그게 항상 A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빨간 수박이 기본 수박 모양이고 노란 수박은 기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수박이다.
영어 원어민이 빨간 수박이고 중학생 이후에 영어를 배운 나의 영어는 노란 수박이 아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원어민이 영어의 기준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빨간색과 달라도 너무 다른 나의 노란색 영어가 너무 싫고 미웠다.
빨간 수박과 노랑 수박이 함께 담긴 과일 샐러드 그릇은 그냥 빨간 수박만 가득 담긴 그릇보다 더 아름답다. 물론 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빨간 수박만 담긴 그릇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영어 실력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 빨간 수박과 노란 수박이 담긴 그릇이 더 아름답다고 미의 취향을 바꾸기로 한다.
노랑 수박을 먹으면서 영어를 생각하다니 난 정말 뼈 깊은 영어 선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