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왕래하는 미국 지인 중에 마사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집에 엄청난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 일생동안 자신의 친척이나 친구를 통해 얻게 된 레시피다. 레시피 매거진도 매달 구독해서 읽는다. 구독비가 비싸던지 싸던지 나는 도저히 내 돈 내고 읽지 못할 매거진이다. 할머니는 나에게 정기적으로 자신이 다 읽은 레시피 매거진을 주신다. 처음에는 그냥 맛있는 음식 사진만 술렁술렁 보고 재활용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레시피 영어는 일반 영어와 너무 다르다.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어떻게 해서 먹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필요한 재료와 양이 이해할 수 없는 수학 기호처럼 보인다. 한국어로 써진 레시피와는 전혀 다르다. 티스푼, 테이블 스푼, 계량컵 등을 정확하게 쓰는 영어 레시피와 달리 한국 레시피는 밥 먹는 숟가락 기준이 기본이기 때문에 요리를 자주 하지 않아도 그리 낯설지 않다. 삼시 세끼 밥 먹을 때 항상 사용하는 밥 숟가락과 매우 친밀하기 때문인것 같다.
영어 레시피는 영어 단어 뜻을 알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다. 내가 그 레시피를 사용해서 직접 그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레시피는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살아있는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그저 영어 단어를 한국 뜻에 대응시켜 해석 연습하는 '짧은 글'이 되었다. 뜻을 알아도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답답한 상황.
하지만 미국방식대로 음식을 직접 해서 먹는 횟수가 늘수록 레시피의 영어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영어 레시피는 '읽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게 아니라 '직접 만들기'위한 목적으로 쓰인 것임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개죽이 되던 소죽이 되던 직접 만들어봄으로써 영어 레시피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마사가 며칠 전에 준 All recipes라는 매거진을 넘겨 보다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사진을 발견했다.
Chicken Katsu라는 이름의 레시피.
재료 중에 내가 사야 하는 것은 panko라 이름하는 빵 부스러기뿐이라서 간단하게 많은 돈 들이지 않고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한번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치킨을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게 통과.
그런데 접시를 3개나 준비해서 각 접시 위에 밀가루, 계란, 빵부스러기를 놓으라는 대목에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레시피 읽으면서 음식을 바로 하려니 내가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로 하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접시가 3개 필요하다는 것도 미리 말도 안해준 레시피가 야속하기만 했다.
왜 레시피에는 음식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는 미리 말해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레시피를 충분히 정독하고 요리과정을 머릿속에 그려 본 다음에 음식을 만드는 게 순서였지만 성질 급한 나는 무조건 먼저 일을 저지르고 보니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혼비백산이 될 수밖에. 요리사는 절대 성질 급하면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없을 듯하다.
부랴부랴 접시를 꺼내서 준비하고 각 접시 위에 재료를 하나씩 놓았다. 그러고 나서 치킨 한 조각씩 밀가루 무치고 계란물 입히고 마지막으로 빵부스러기를 묻혔다. 그리고 난 후 내 손은 빵부스러기로 지저분해져서 새로운 치킨 조각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을 깨끗이 씻고 다시 밀가루 무치고 계란물 입히고 빵부스러기 입히는 과정을 반복했다.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치킨을 전부 먼저 밀가루에 무치고 그다음에 계란 그다음에 빵부스러기를 묻히면 더 수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을 다 해 먹고 다시 레시피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레시피는 분명히 모든 치킨 조각을 순서대로 처음엔 밀가루, 그다음엔 게란 마지막으로 빵부스러기를 묻히라고 써져 있었다. 머리가 미리 고생하지 않으면 이렇게 몸이 고생한다.)
빵 부스러기까지 다 묻힌 치킨은 냉장고에다 넣고 10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흠뻑 붓고 튀겼다. 기름은 모든 기름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다. 올리브기름은 튀기는 음식에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 스테이크를 굽는데 올리브유를 쓰려고 했다가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 알게 되었다. 튀기는 음식은 아보카도 오일을 쓰는 거라고.
튀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Golden brown 금빛 같은 갈색이 돌면 뒤집었다. 그리고 4분 정도 지나자 앞 뒤 다 노릇하게 구워졌다.
맛있게 튀겨진 치킨을 키친 페이퍼로 기름을 빼고 도마에 놓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큰 접시 위에 밥을 깔고 그 위에 치킨을 올렸다.
단무지가 있었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이곳 미국에서 노란 단무지는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나의 최애 김치와 함께 먹었다.
배가 고파 급하게 마지막 밥알 하나까지 다 먹고 깨달았다.
'내가 방금 먹은 게 치킨 까스였구나.'
레시피에 분명히 tonkatsu를 만들어 먹으려면 치킨 대신 돼지고기를 사용하라고 써져 있었는데도 나는 돈까스는 알았지만 tonkatsu는 몰랐다. 다 만들어 놓고 먹고 난 후에 내가 해서 먹은 음식이 치킨 까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몇몇 일본 음식점에서는 ~까스라고 안 쓰고 ~카츠라고 명명한다는 것도 뒤늦게 기억해냈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치킨 까스나 돈까스는 기름에 튀기는 게 귀찮아서 직접 해 먹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마 치킨카츠가 치킨 까스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음식 만들기에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이 말인 듯하다.
마지막으로 사용 후 남은 기름은 병에 모아 두고 기름 범벅인 프라이팬은 커피 찌꺼기를 뿌려 기름을 키친 페이퍼로 씻어내고 씻는다. 커피 찌꺼기가 기름을 흠뻑 마셔서 프라이팬을 씻는 게 무척 간편해진다. 기름 한 방울 없이 깨끗하게 씻겨진 프라이팬처럼 내 마음도 뿌드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