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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영어 쌤

짧은 생각

by Sia

올해는 수업을 적어도 80% 이상은 영어로 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냥 해보고 싶었다. 영어수업을 영어로 하라는 교육부의 지침이 내려올 때는 괜한 반항심에 이것저것 핑계를 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해를 못해요"라며. 하지만, 올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번 영어로 하는 영어수업을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의 영어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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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결심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으면 절대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서 같은 학교에 있는 한 영어 선생님에게 선포했다.

"쌤~ 저 이번 학기에 제 수업을 80% 이상을 영어로 하려고 해요."

"어~ 정말? 목표를 너무 높게 잡은 거 아냐? 그러다 중간에 포기할 것 같은데~"

"그럼 제가 매주 금요일 오후에 쌤이랑 만나서 보고할 게요. 제가 이번 학기 시수가 17이니까 14개 이상 수업을 80% 이상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내가 쌤한테 일주일에 만원씩 줄게요!"

"오~ 진짜? 그럼 난 좋지~!!"


일주일에 만원은 나한테 엄청 큰돈이다. 한 달에 나의 생활비는 25만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렇게 큰돈을 걸고 싶었다. 영어로 수업하기는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목표니까.


새학기 첫 영어시간.


80% 이상을 영어로 수업하지 않으면 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영어 선생님이 내 수업을 참관하러 들어오셨다. (나한테 미리 말도 없이) 처음엔 좀 당황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내 수업에 관한 여러 가지 조언을 듣고 싶었던 마음도 컸기에 너무 기뻤다. 비록 수업은 20분 만에 끝났지만, 100% 영어로 수업을 했다. ( 중간에 한 학생의 응답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감탄사를 한국말로 한 것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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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반응을 볼 여유는 없었다. 우선 첫 단추를 잘 끼운 것에 너무 만족하며 나 스스로를 자축하기에 바빴다. 다음 시간에 같은 수업을 다른 반 아이들과 함께했다. 첫 수업이라 아이들에게 나에 대한 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1가지 거짓말과 2가지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거짓을 찾으라는 내용이었다. 거짓은 바로 내가 아들이 3명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업을 다 마치고 아이들에게 교실로 돌아가라고 인사를 나누며 헤어지는 그때 한 남학생이 혼잣말을 한다.


"Son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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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학생에게 답을 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그다음 시간에 수업하는 친구들에게는 son이 한국말로 무엇이냐고 물어봤고, 한 아이가 완벽한 한국말로 대답을 해줘서 잘 넘어가게 되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교무실로 가는 길에 한 여학생이 내 이름을 부른다. 영어시간에 나는 아이들에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라고 했다. 그냥 나의 이름 "Jina"를 영어식 발음 '쥐나'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여학생이 너무 반갑게 "쥐나! 쥐나!" 이렇게 불러준다. 한 시간 그것도 20분밖에 수업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바로 반응이 오다니 너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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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생에게 난, "Hi, how are you?" 라고 인사를 해 줬다. 그런데 학생 왈 " 어... 음..... Oh~ I'm 14." 아니 이게 뭔 자는데 봉창 뚜드리는 소리인가 했다. 그래서 다시 "How are you?"라고 물어봤고,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야~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보잖아."라고 말해주니까 그제야 알아듣고, "Ah~ good~!" 라며 너스레를 떤다.


옛날 같았으면, '에고 이런 기초도 안된 애들을 어떻게 가르친담'이라며 낙심했을 텐데 지금은 이런 아이들의 시도들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뭔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나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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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은 건 아니다. 아이들의 영어 실력과 영어 흥미도에 관한 구글 설문지를 받았다. 설문에는 영어 선생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쓰라는 항목이 있다.


"모든 걸 영어로 설명을 하셔서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조금씩 있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문장들 중에서 긴 문장이나 몇 개의 문장은 해석을 조금 해주세요."


이 학생은 딱 봐도 영어를 잘하는 축에 드는 학생인 것 같았다. 영어로 하는 영어 수업이라는 나의 목표에 제동이 걸린 것 같았다. 이 학생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영어를 100%로 다 이해하며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나? 아니면 정말 영어로 말하면서 계속 한국말로 다시 말해줘야 하나? 아... 그건 아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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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영어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말을 하다 보면, 관계사를 써서 길게 말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긴 영어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도 읽는 것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기란 참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이 학생이 수업시간에 느꼈을 고충이 조금은 느껴진다. 다 이해하고 싶은데,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답답했던 마음. 나도 그랬으니까. 100% 다 들리고 이해해야 가슴이 후련한데 그렇지 않으니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본인의 영어 실력에 대한 자괴감이 들기 시작하면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아직까지도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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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다가오는 새로운 한 주에는 또 어떤 재미있고 기똥찬 일들이 일어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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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수업을 100%로 영어로 하는 것은 아니다. 수업 설명은 8분 내외의 동영상으로 하는데, 이 동영상은 한국말로 설명한다. 내가 말한 100% 영어는 수업시간에 하는 지시사항같은 부분을 의미한다. 오해 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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