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에서 활약한 엄마의 영어 이야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영어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수업시간 주제는 '발음'
작년에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기초학력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요구한 게 있었다. 바로 영어 단어 발음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학교 영어수업에서 발음기호 수업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다음 시간부터는 발음기호 수업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 발음과 다른 영어 발음의 특징도 같이 정리해서 알려줄 예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수업이 20분인 관계로 영어 발음 기초 수업에 대한 맛보기 수업을 진행했다. 교과서에 나온 표현"Excuse me. How much are the round glasses?"를 이용하여 내가 직접 한국식으로 발음하고 영어식으로 발음해 준다음 한국식 소리와 영어식 소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익스큐즈 미. 하우 머치 아 더 라운드 글래시즈?
내가 너무 한국식으로 발음을 했는지 몇몇 학생들이 키득키득거린다. 몇 번 더 반복해서 구수한 된장냄새 풀풀 나는 한국식 발음으로 이 문장을 읽어줬다. 그러고 나서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다. 한 남학생이 대답한다.
"판소리 느낌이 나요."
판소리는 내가 본격적으로 발음수업을 위해 준비한 자료였다. 그런데, 이 똑똑한 학생이 바로 이렇게 알아맞히다니! 이 학생에게 한껏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뿌려준 후에 같은 문장을 영어식으로 강세를 넣어가며 발음해 줬다. 그랬더니 한 학생 소리친다.
"Oh~~ Amazing!"
난 그 학생에게 왜 이 소리가 amazing 한 거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학생 왈; "Very much English."
그래서 다시 전체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영어문장을 영어식으로 발음한 게 왜 대단한 거죠?" 한 여학생이 손을 들며 말한다.
"영어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사람들이 한국식으로 발음할 때 우리는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냥 한국말로 한 것뿐이고. 그래서 영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정확하게 나의 의도를 간파한 학생이 있을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원어민다운 영어 발음에 기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이 수업의 의도였다. 하지만, 기본적인 영어 발음의 특징도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렇게 발음하지는 못하더라도, 한글 소리와 영어 소리의 기본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알아야 영어 소리를 듣을 때도 조금 더 쉬워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한번 영어식으로 문장을 읽어 주고, 어떤 느낌이 나는지 물었다.
계속 영어로 답변을 하는 남학생이 말한다.
"Smooth~"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니, 다른 학생이 말한다.
"한국식은 딱딱 끊어지는데, 영어는 부드럽게 단어가 서로 다 이어져요."

오~~ 아이들이 이렇게 영어의 연음 현상도 바로 잡아낼 줄 알다니. 오늘 수업은 정말 감동의 도가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친다. 아쉽게 아이들을 보내고 구글 클래스룸에 올리는 과제를 꼭 하라고 당부했다. 과제는 영화 '미나리'의 여주인공 윤여정 배우가 영어로 말하는 유튜브 영상과, 진수 테리라는 어느 여성이 미국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영상을 보고 영어를 말할 때 꼭 원어민처럼 발음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댓글로 달라는 것이었다. (진수 테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 악센트가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미국에서 강연료를 웬만한 미국인 유명인사보다 더 많이 요구한단다.)
https://www.youtube.com/watch?v=pXEv0H7vbNQ
https://www.youtube.com/watch?v=U_7V7yvVR-Q
물론 모든 학생들이 숙제를 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이 주옥같은 댓글을 달아주었다. 가뭄에 콩 나듯 숙제를 해주는 아이들 덕에 힘을 낸다.
"발음이 안돼도 최선을 다하자"
"외국인이랑 말할 때는 한국식 말고 영어식 발음을 쓰도록 노력해야겠다"
"한국식 발음이라도 영어로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을 조금 배려해서라도 영어식 발음으로 개선해보려고 노력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무엇이든 당당함이 중요하다"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미국 사람이랑 이야기하려면 영어식 발음을 조금이라도 배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떤 언어든간에 발음이 좋은 거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정확히 전달될 수 있게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식 영어 발음으로 영어를 해도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래도 영어 발음을 잘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잘 못하지만 본인이 말할 수 있는 한에서 한국어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외국인에게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영어를 잘 못한다고 얘기를 하면 외국인들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조금 버벅거리거나 서투르더라도 그 내용의 의미만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댓글을 보며 앞으로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미래가 참 밝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쓴 말 한마디 마디가 모두 다 옳은 말이었다. 이런 옳은 말을 내가 하면 잔소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아이들이 직접 생각하고 손으로 쓴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일부터는 온라인 수업이 진행된다.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이 많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영어발음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들이 어떨지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