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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Mar 17. 2023

고드름 나무

미국 뉴욕 알바니

이상한 눈폭풍이 지나갔다. 눈이 45cm 넘게 내렸지만 내린 눈의 절반 이상이 물로 녹아버렸다. 눈폭풍이 오기 전날부터 사람들이 난리 더니 결국 학교도 문을 닫았다.


온 세상은 새하얀 슬러쉬로 뒤덮였다. 눈 슬러쉬는 내 발목을 조금 넘을 만큼만 쌓였다. 호들갑이었다. 하지만 벌몬트주에 사는 교수님 집은 자꾸 정전이 돼서 약속된 줌미팅을 이틀이나 연기해야 했다.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게 전기가 나가는 것이었다.

슬러쉬 눈은 이제 지겹다. 하얀색도 지겹다. 빨리 봄이 오고 뜨거운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바람은 왜 또 이렇게 강하게 부는 건지 애꿎은 바람만 미워진다.


바람의 등쌀을 못 이기고 큰 나무의 우람한 가지들이 처참하게 나무 몸통에서 떨어져 죽어간다. 이까지 눈에 이까지 바람에 저렇게까지 나가떨어지는 나무가 이해가 안 된다. 얼마나 나약한 나무였으면 그럴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본다. 이 눈 폭풍에 죽은 나뭇가지들은 연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나무에서 가장 강인한 부위였다.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 부위였다. 그래서 조금 센 바람에 쉽게 나동그라졌다. 너무나도 강하게 움직이지 않으려는 고집이 죽음을 자초했다.


땅을 보고 걷는 나의 '못된 습관'이 아니었다면 놓칠 뻔했다. 이 고드름 나무. 못된 습관도 연약함도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오늘 하루 제대로 끝낸 일 하나 없어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이 고드름 나무가 나쁜 기운을 순식간에 빼앗아 갔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조각을 보고 있으니 나 자신도 덩달아 아름다워지는 느낌이다.


오늘도, 내일도, 내일모레도 제대로 못해도 괜찮다. 저 고드름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이 우리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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