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여 년 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수업시작 전 들린 여자화장실은 이미 모든 칸에 사람이 다 있었다. 잠시 후, 내가 서 있던 바로 앞 칸막이에서 나온 사람은 긴 머리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남자 같은 얼굴 생김새를 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턱에는 까칠까칠한 털도 수북이 있었다.
'저 사람 뭐지?' 하며 속으로 뜨악하고 있는데 높은 목소리 톤으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Hi"라고 인사를 한다. 나도 같이 인사를 해줬다. 이 사람은 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고, 나중에 트랜스 젠더였음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미국 뉴욕주에서 다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첫 수업부터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본인이 원하는 프러나운(prnoun; 대명사)을 이야기하라고 한다.
'웬 프러나운?' 하며 어리둥절해졌다. 결국 앞에서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을 잡기 시작했다. "여자"처럼 보이는 한 학생이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앨리슨입니다. 저의 프로나운은 she, her, hers입니다."
수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났을 때 가지고 태어난 성별과 모두 동일했다.
줌으로 이루어지는 다른 수업에서 교수님은 자기 이름 옆에 프로나운을 써도 좋다고 하면서 본인이 먼저 솔선수범을 보인다. 여자로 보이는 어떤 학생은 자신의 프러나운을 she/they로 썼다.
한국 영어공교육을 철두철미하게 배운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they는 분명히 복수명사를 대신 받아주는 단어이다. 두 명 이상일 때만 쓸 수 있는 대명사가 they이다. 하지만 이 여학생은 분명 1 사람인데 어떻게 they를 쓰는 거지?
영어는 대명사(pronoun)가 한국어에 비해서 매우 발달됐다.
그 이유는 먼저 "명사"가 문장에서 매우 자주 쓰이고 있고, 이미 언급한 명사를 다시 또 되풀이해서 똑같은 단어를 쓰는 것을 영어는 싫어하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라도 반드시 다른 단어나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언어이다.
아마도 같은 말을 반복하기보다는 비슷한 단어를 다양하게 여러 번 쓰는 것이 듣는 사람이 확실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영어는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한국말은 정확하고 명확한 메시지 전달은 "같은 말"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술만 마시면 같은 이야기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같은 말 반복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어릴 적부터 영어 DNA가 꿈틀거렸나 보다.
Tom이라는 어떤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Tom이라는 이름을 계속 쓰기보다는 Tom을 대신해 주는 대명사인 he (주어자리) /him (목적어자리)/ his (소유격)를 쓴다. 대명사는 문장의 위치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진다. 한국말은 조사가 있어서 주어, 목적어 자리에 오는 단어에 적절한 조사를 붙여주지만, 영어는 단어 자체가 아예 달라진다. 그래서 보통 프러나운을 말하라고 하면 세 가지 모양새나 더 간단하게는 두 개 (he/ him)만 이야기하기도 한다.
they는 보통 복수명사를 대신하는 대명사라고 알고 있지만, 단수명사를 대신하는 they도 이미 영어에서 쓰인 지 오래다. 영어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어떤 한 사람을 대신 지칭하면서 they를 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성에 대한 구별이 없는 대명사인 they를 쓰는 것이다.
John is substituting for me today and they are an incredible mathematician.
[존이 오늘 나를 대신할거에요. 존은 놀라운 수학자이에요.]
위 문장에서 they는 John을 대신 받고 있다. 그래서 이 they는 복수가 아닌 단수 they이다. they 뒤에 오는 are는 그러나 복수형태의 동사이다. 문법적으로는 단수와 복수 they 둘 다 복수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구분한다. 그래서 뒤에서 they are an incredible mathematician. 에서는 an이라는 단수명사를 나타내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모임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프러나 운을 공개적으로 공개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젠더를 얼굴생김새로 추측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프로나운을 공개하면서 상대의 젠더를 존중해 주는 첫 단계라고 본다.
그러면 상식으로 성과 젠더에 대한 기본 개념을 한번 살펴보자.
Sex (섹스): 태어날 때 타고난 생물학적 성이다. 남성(male), 여성(female), 중성(intersex)이다.
중학생 아이들이 섹스는 항상 동사로 생각하면서 히죽거리며 이 단어를 학교 여기저기에 쓰고 다니던 일이 있었다. 영어단어 sex는 명사로 쓰일 때는 생물학적 성을 의미한다. 중딩들이 열열한 관심을 가지는 그런 의미가 이니다. 그 의미가 될려면 동사가 되어야 한다.
Gender (젠더): 사회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사회가 남자가 해야 하는 일, 여자가 해야 하는 일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남자, 여자, 제3의 성(nonbinary)이 있다.
씨스젠더 혹은 씨스 (Cisgender, cis): 태어날 때 타고난 성과 젠더가 동일한 사람을 의미한다. 남자는 여자만 좋아하는 사람, 여자는 남자만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프로나운이 they/them라고 하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들의 젠더를 추측하지 말아야 한다. 나와 수업을 같이 들었던 그 여학생처럼 여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they/them프러나 운을 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3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제3의 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젠더를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 갇혀두는 것을 싫어한다.
이외에도, 성전환 수술을 받고 성이 전환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성 정체성에 확신을 느끼는 못하는 사람들도 they/them을 쓸 수도 있다.
진보적인 성향의 교수님들은 보통 이메일 서명란에 자신의 프러나운을 기입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보면 번거로운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답게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이런 노력이 언어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외모만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추측하는 실수는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다. 물론 모든 미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것을 기반으로 한 섣부른 판단을 자제하자는 것은 지혜로운 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