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멧은 터키출신이지만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작년 6학년 때 미국으로 와서 처음 미국 공교육시스템을 경험하고 있다. 니멧은 미국에 오자마자 영어말하기 실력이 남달라서 학교에 있는 선생님들이 영어학습자를 대상으로 인터뷰할 때면 언제나 제1 선호대상이었다.
올해 또다시 니멧을 만나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햇살이 비취는 날이라 킴 선생님은 아이들을 다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런 좋은 날도 이젠 보기 힘들 거예요. 겨울이 금방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애들은 쉬는 시간도 없이 1시간 30분 연속해서 수업을 들어야 해요. 이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아요."
킴 선생님네 학교는 쉬는 시간이 없다. 물론 점심시간이 있지만, 각 교시 간 공식 쉬는 시간이 없고 대부분의 수업은 블록타임으로 1시간 30분이다. 작년부터 이 중학교에서 계속 수업관찰을 해 오고 있지만, 정말 아이들은 이 긴 시간 동안 딱딱한 철제 의자에 앉아 잘 버티며 공부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나뭇잎, 꽃, 돌 등 다양한 것들을 찾아서 비닐봉지에 담아 오라는 미션을 받은 아이들은 서로 1등을 하겠다고 난리다. 얼떨결에 나도 이 미션에 동참한다.
비닐봉지 한가득 미션을 담고 다시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봉지에 담긴 몇 가지 것을 골라 그것을 묘사하는 글을 쓰게 했다.
한참 열심히 글을 쓰던 니멧은 작은 소리로 자기가 쓴 글을 읽어본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나에게 말을 건다.
"있잖아요. 제 여동생이 있는데, 어제는 동생이 초등학교에서 가져온 영어책을 내가 거실에서 읽어줬어요.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이 제 영어실력이 엄청 좋아지고 있다고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어요."
"우와~ 니멧. 기분 엄청 좋아겠다."
니멧은 나의 반응에 두 눈을 살포시 감으며 피에로 입술을 하고 고개를 연속 끄덕인다.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니멧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킴 선생님은 니멧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다시 말해달라고 한다.
나에게 해준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면서 니멧은 덧붙인다.
"터키 사람들은 영어로 말할 때 악센트가 있어요. 제 아빠도 몇 십 년 넘게 우간다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영어로 말할 때는 악센트가 있어요. 그리고 우간다 사람들이 하는 영어도 악센트가 무척 강해요. 며칠 전에 우간다 사람들 비디오를 봤는데, 전 이젠 이해 못 하겠더라고요. 내가 예전에 어떻게 이해했나 싶어요."
자신의 영어에는 터키 악센트나 우간다 악센트가 거의 없다는 것이 니멧은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니멧은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국어 악센트가 있는 영어가 악센트 없는 원어민식 영어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았다.
나도 예전에는 내 영어발음에서 나오는 한국식 악센트가 부끄러웠다. 원어민식 영어가 최고의 영어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 미국에는 같은 영어 원어민사이에도 다양한 악센트가 존재한다. 텍사스, 버지니아, 뉴욕 등 같은 영어권이지만 지리적으로 영어발음이 천지차이다.
나의 시어머니는 버지니아 출신이다. 오랫동안 뉴욕에 사셔서 버지니아 특유의 발음은 거의 사라졌지만, 시어머니의 남동생은 아직도 버지니아에 살고 있어서 버지니아 영어 발음이 매우 강하다. 북쪽 버지니아 발음은 그나마 뉴욕 영어에 가깝지만, 남쪽 버지니아는 정말 다르다. 시아주버니는 남쪽 버지니아에서 평생을 살고 계신다. 가끔 남편과 전화통화하는 것을 듣곤 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듣는다. 한국상황으로 따지자면 서울말씨를 하지 않고 강한 지역 사투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미국 지역 사투리 영어에는 차별을 두지 않으면서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 억양이 들어간 영어를 말하는 사람은 깔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프랑스식으로 영어를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추앙을 받는다. 중국어나, 한국어 등 아시아권 언어 억양을 가지고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못한다고 본인 자신부터가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가진 영어 원어민들도 있다.
악센트는 어떤 악센트가 더 좋고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다.
사람들이 경제 사회 문화 역사적인 여건에 따라서 특정 악센트가 다른 악센트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결국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는가의 선택이다.
물론 악센트를 공부하는 것도 언어 공부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한국 영어교육은 영어 발음 교육을 제대로 시켜주지 않는다. 그냥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영어에 노출시키면 발음은 좋다더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전부다. 교육은 제대로 시켜주지 않으면서 영어발음에는 매우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인들을 보면 매우 슬프다. 물론 나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자기는 악센트가 없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니멧을 보면서 난 갑자기 슬퍼졌다. 자신의 악센트를 그렇게 의식하는 사람은 그만큼 다른 사람의 악센트도 날카롭게 비난하게 된다. 다른 이를 깔아 뭉개는 것은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센트가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와 환경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악센트를 비난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존재를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
한 사람의 말투가 어찌 됐든, 생김새가 어찌 됐든, 피부색이 어찌 됐든, 인간이기에 우리는 다 존중받아야 한다.
우린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고 더 중요한것은,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으며 인간으로 존중해주고 그들의 존엄성을 인정해주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