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추수감사절 가족 점심
남편은 추수감사절 아침밥으로 냉동 크로와상을 오븐에 구워 먹겠다고 했다. 오전 10시 눈을 떴는데, 크로와상 냄새가 나지 않는다. 전날 밤 나의 계획은 시부모님 댁에 10시에 도착해서 추수감사절 점심 차리는 것을 도와드리는 것이었다. 이미 늦었다. 허겁지겁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니 남편은 느긋하게 변기에 앉아 아이패드를 하고 있다.
"뭣해! 우리 늦었어!!"
"아니야, 우리 시간 충분해. 엄마가 1시에 점심 먹는다고 했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1시에 점심을 먹을 테니 그 시간 맞춰서 부모님 집에 갈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할 뿐이다. 남편이라는 종족만이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인가?
남편을 다그쳐 빨리 샤워하고 간단하게 아침은 요거트로 때우라고 명령하고 허겁지겁 남편을 데리고 시부모님 댁에 갔다. 물론 남편이 운전을 했지만 내가 데리고 간 거나 다름없다. 도착해 부모님 집 부엌에 들어가니 딱 12시.
이미 터키는 오븐에서 구워지고 있었고, 점심으로 먹을 다양한 음식들이 카운터에 나와 있었다. 허겁지겁 뭐부터 해야 할까요라고 시어머니에게 물어봤고, 시어머니는 전자레인지에 이런저런 음식을 데우라고 알려주신다. 남편이 아이패드 삼매경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부엌을 여기저기 왔다 갔다 거린다.
추수감사절 음식은 별거 없다. 터키 가슴살이 메인이고 나머지 사이드는 이것저것 다양하다. 작은 오이 피클, 수박껍질 피클, 올리브를 시어머니의 지시대로 접시에 담았다.
조용히 말없이 허니듀를 싱크대에서 씻어 두신 시어머니에게, "이거 자를까요?"라고 물어보니, "그래, 잘라서 과일 샐러드 좀 만들어라. 파인애플이랑 포도 다 여기 내놨어."
허니듀를 잘라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이것저것 하라고 절대 시키지 않는다. 뭐든 내가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물어보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질문해야 한다. 추수감사절 다음날 문자를 보내, "자발적으로" 추수감사절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신 시어머니다.
과일샐러드를 다 만들고 나니, 너무 예쁘게 담았다고 칭찬일색이다. 내 눈에는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크랜베리 소스 캔 하나가 나의 레이다에 걸렸다. 시어머니가 하는 것처럼 캔의 종이를 잘라서 버리고, 캔을 물에 씻고 물기를 닦은 다음 캔 오프너를 이용해 열었다. 그리고 칼로 잘라 시어머니가 주신 용기에 담았다. 굵기가 일정치 않게 잘려서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데, 시어머니는 아주 예쁘게 잘 잘랐다고 칭찬한다.
추수감사절의 하이라이트 터키가 다 구워졌다. 터키 속에 온도계를 넣어보시던 시어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온도가 너무 높이 올라간다고, "빌이 또 뭐라고 하겠어. 터키가 팍팍할 것 같아."라며 걱정하신다.
30분 정도 터키를 식인후 남편 보고 자르라고 했다. 칼 솜씨가 영 내 맘에 들지 않는다.
"나 아침으로 먹은 게 요거트 뿐이야. 지금 엄청 배고프다고..."
결국, 내가 칼을 잡았다.
터키 가슴살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잘 잘라져 나온다.
접시에 일단 담아두고, 다른 음식을 준비한다. 시어머니가 며칠 전에 삶아둔 고구마를 갈고, 시어머니의 레시피에 따라 다양한 조미료를 넣은 다음 볼에 넣었다. 그 위에는 하얀 마시멜로를 듬뿍 올리고 오븐에 넣는다. 마시멜로가 녹아서 두껍게 갈색 층을 이루면 완성이다. 완성된 음식들은 가족이 함께 먹을 테이블 위에 하나둘 놓아두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시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금 테두리 식기가 별거 아닌 추수감사절 음식을 매우 돋보이게 해 준다.
"이 식기 너 가질래?"
어제부터 시어머니는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신다. 식기에 별 관심이나 욕심이 없는 나는 별 감흥 없이 반응했다. 오늘도 또다시 물어보는 시어머니에게 오늘은 흔쾌히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래야 이 질문을 또 받지 않을 테니까...
"저 주신다면 감사히 받을게요."
"테두리가 금이라서 이 식기들은 절대 전자레인지나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된다~"
이 경고사항도 어제부터 들었던 내용.
팍팍하고 밀가루 냄새나는 디너롤도 이렇게 보니 예쁘고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버터를 바르지 않으면 도저히 먹을 맛이 안나는 빵이다.
1시에 먹자던 점심은 결국 2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모두들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점심이 정말 맛있었다고 서로서로 칭찬한다.
점심을 다 먹고 난 후, 시어머니는 나에게 절대로 그릇을 씻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신다.
"나 자신과 약속했어. 너에게 이번만은 설거지를 시키지 않겠다고 말이다."
보통 일요일 점심을 시부모님과 시부모님 댁에서 같이 먹는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나와 남편은 항상 설거지를 한다. 그럴 때면 시어머니는 항상 고마워하고 미안해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계속 나에게 설거지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나 회사 동료들한테 추수감사절 점심 식사 설거지 한다고 발표하고 왔어!"
남편이 상황을 종료시켰다. 결국 셋이서 함께 설거지를 했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릇의 물기를 닦는 분업.
"설거지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점심을 먹고 바로 TV시청으로 직행한 시아버지가 우리들을 바라보며 논평 한다.
2시에 먹은 점심은 배속에서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나는 남편과 시어머니와 함께 거실에서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침대위에서 누워자고 싶은 충동을 겨우 이겨낸다. 저녁 7시가 다되서야 남편을 설득시켜 집에 되돌아 왔다.
"도저히 이해가 안돼. 너 오늘 한거 별로 없는데, 왜 피곤해 하는거야?"
내가 오늘 한 일이 육체노동으로 따지면 별거 안되지만, 정신노동으로 따지면 어마어마 하다. 왜 이런것을 일일히 설명해줘야 할까. 아니, 설명해도 이해 못할테니 차라리 말없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아껴야 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무말 없이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너 나한테 화났지?"
화를 내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화도 나지 않는다.
"피곤해서 그래."
결국, 이렇게 미국에서 처음 맞는 추수감사절 시월드가 끝났다. 내일은 다시 나의 본업 직장일로 돌아가야 한다. 그냥 다음주 월요일까지 쭉 쉬고 싶다. 시월드는 지구 반대편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은 시월드다. 남편도 한국 남자나 미국 남자 상관없이 명절이면 모두 내편이 아닌 "남의" 편인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