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학교 봉사활동기
점심을 먹은 후, 아이들은 1시간 30분 동안 액세스라는 '자율학습'시간을 갖는다. 밀린 과제를 하거나, 다른 친구 숙제를 베끼거나, 크롬북 게임을 하면서 아이들은 제각기 조용한 시간을 보낸다. 나는 킴의 교실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다가 액세스가 끝나고 짐을 챙겨 수학교실로 향했다.
올 5월에 대학원을 갓 졸업하고 바로 8월부터 수학교사가 된 조디가 교실 문 앞에서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추수감사절은 잘 보냈나요?"
조디는 그리 나쁜 추수감사절은 아니었다고 하면서 질문을 나에게 되묻는다.
"저는 시부모님 집에 가서 음심 만드는 거 도와드렸어요."
눈알을 굴리며 어이없어하는 조디의 표정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다 보상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도 금요일에는 남자친구 부모님 집에 갔다가 토요일에는 제 부모님 집에 갔어요."
"아니, 벌써부터요?"
"그러니까요."
어느덧 교실이 다 찼고, 조디는 수업을 시작한다. 분수와 소수를 비교하는 수업. 아이들은 수학시간에 계산기를 자주 사용한다. 계산기로 분수를 소수로 계산하는 방법을 몰랐었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조디는 첫 문제를 학급 모두와 함께 같이 푼 다음 두 번째 문제로 향한다.
그런데 조디의 입에서 '잡채'라는 정확한 한국어가 나온다.
갑자기 웬 잡채?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잡채가 뭔지 아냐고 질문하는 조디에게 아이들은 '국수'라고 답변한다. 한국음식을 무지 좋아하는 클리아는 손을 번쩍 들고 잡채에는 여러 가지 야채가 들어가는 국수라고 자신감 있게 발표한다.
문제를 두 번째로 다시 읽는 에바는 잡채(japchae)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않는다.
갑자기 상황이 역전된 느낌이다.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미국에서 겪는 어려움의 억만 분의 1을 에바가 느끼는 찰나이다. 에바와 같은 영어 원어민들은 나와 같은 영어학습자들의 고초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문제를 푸는 시간의 틈새를 타고 조디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문제 선생님이 직접 만들었나요?"
큰 동그란 눈이 더 휭둥그레 지며 조디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수학교과서에 있는 문제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제 발음 정확했나요?"
조디의 잡채발음은 완벽했다. 역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우리 인간들은 전부 "발음"에 집착하는 건 언어, 문화, 사회, 인종을 막론하고 다 똑같나 보다. 발음이 정확했다고 칭찬하니 조디는 교실이 떠나가라 좋아하면서 웃는다.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조디에게 교실 대형 스크린을 내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조디는 너무나도 흔쾌히 허락한다.
오늘처럼 수학시간이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킴의 교실로 올라가서 킴에게 이 이야기를 반드시 해줘야 했다. 킴도 순식간에 나와 같이 행복해진다.
"몇 년 전부터 수학교재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이름이 실리고 있어요. 오늘 한국 음식을 만나서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겠네요."
잡채를 발음하지 않고 넘긴 에바 이야기를 했더니 킴은 빵 터진다.
수학교실에는 한국 학생들이 한 명도 없었지만, 만약 있었더라면 그 학생은 오늘 정말 행복했었을 거라는 나의 말에 킴의 얼굴에 순식간에 안타까움의 주름이 생긴다.
몇 년 전에 킴의 중학교에는 수많은 한국 학생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킴의 교실 한켠에는 한글로 쓰인 많은 소설책들이 있다. 킴은 그 많던 한국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안타까워한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는 김치를 무척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킴이 가장 좋아하는 김치는 무 물김치. 남편은 무 물김치 냄새를 맡고 어떻게 저런 것을 먹을 수 있냐고 항상 놀리지만 킴은 무 물김치만 생각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고 난리다.
어릴 적, 겨울이면 살얼음 동동 떠나니던 동치미와 아랫방 아궁이 불에 갓 구운 고구마를 먹었던 순간이 떠 오른다. 엄마 동치미는 나에게 겨울 최고 별미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눈발이 휘날린다. 바로 이 날에 먹어야 하는 동치미인데... 엄마한테 국제택배로 동치미 보내달라고 할까... 아.. 이제는 국제택배로 김치를 보낼 수 없지...
김치에 들어간 젓갈이나 액젓 알레르기로 김치를 못 먹는 미국 남편이 갑자기 미워진다. 남편이 먹을 수 있으면 동치미도 담그고 김치 담그는 것도 한번 시도해볼 텐데. 하지만, 수학시간에 만난 잡채덕에 눈발이 휘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는 집으로 향하는 발은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