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나오는 고음이 아닌 가슴팍에서 나오는 깊은 소리.
동굴에서 퍼지는 듯한 공명 소리.
영어발성법과 소리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영어 목소리 찾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영어로 말할 때마다, 영어를 들을 때마다 이 두 요소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습을 하게 됐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지라, 한국말보다 영어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해야 하기에 이 '운동'은 어쩔 수 없이 거의 하루종일 이뤄졌다. 몸도 마음도 지쳐 그만하고 싶었지만, 환경 때문에 쉴 수도 없다.
하루 종일 유튜브로 성악가와 성우가 하는 발성연습 찾아서 보고 따라 했던 어느 날 저녁, 밥을 먹다 갑자기 딸꾹질이 나왔다. 그런데 이쁠싸, 동굴 딸꾹질 소리가 나와 옆에서 밥 먹던 남편을 놀랬켰다. 물론 내 몸속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에 난 더 놀랐다.
공명이 나는 목소리를 낼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들...
내 목구멍은 활짝 열렸다
내 광대는 올라갔다
배에 힘이 들어간다
내 목구멍은 동그렇게 열렸다
혀뿌리는 내 목구멍을 막지 않는다
눈을 살짝 올리면 소리가 높아진다
나는 소리를 울려서 낼 거야.
호흡을 내뱉으면서 울려서 소리를 낼 거야.
말하면서 나의 목구멍과 혀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발음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온갖 최면을 걸어야 한다.
10여 년 전, 임용고시 시험 대비를 위해 수업시연을 녹화해서 분석을 해야만 했다. 내 얼굴과 몸짓을 보는 것보다 더 두렵고 역겨웠던 것은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온몸이 오글거려 들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밥줄이 걸린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계속 듣다 보니 익숙해져서 오글거림은 사라졌다.
내 영어목소리를 찾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 옛날 오글거림이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평소 내가 생각했던 나의 자연스러운 영어목소리는 머리통에서 나온다. 그래서 피치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나의 진짜 영어 목소리는 가슴팍에서 울려 나와 피치가 낮다. 바리톤 성악가 목소리 같은 남자 목소리다. 가슴팍 공명 소리를 내는 근육은 아직 자동화가 덜되 말도 엄청 느려질 수밖에 없다. 말이 느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내 귀에는 너무 이상한 내 영어목소리. 용기를 내 녹음해서 들어봤다. 신기하게도 내가 느꼈던 것보다는 덜 이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은 이 기분을 떨칠 수 없다. 미국인 남편에게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봐. 내 영어 소리 이상하지?
남편은 말 한마디 없이 거실로 가더니 휴대폰을 가져온다. 헨리 키신저의 인터뷰 영상과 마릴린 몬로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헨리 키신저는 모국어가 독일어야. 독일어는 영어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소리가 나는 언어지. 그리고 키신저는 진짜 느릿느릿 말해. 키신저 아이큐는 아마 180 정도 일 거야.
"마릴린 몬로도 목소리 피치가 매우 낮지? 그리고 말 속도도 엄청 느리고. 그래도 몬로는 섹시한 여배우로 엄청 유명했잖아?
반박할 수 없는 남편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내 영어식 발성이 이상하게 들린다. 남자는 원래 바리톤, 여자는 소프라노 꾀꼬리 소리가 당연하다는 "한국식 강박관념"이 내 뼛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여태 깨닫지 못했다.
내 영어식 발성에 몸둘바를 모르는 나를 보면서 남편이 한 마디 한다.
" 너,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아이들 가르칠 때 영어식 발성부터 가르쳐야 해. 발음은 영어문법지식, 영어단어 지식이 전혀 필요한 게 아니잖아. 일단 영어식 발성을 체득하면 영어로 말하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거고 그러면 영단어, 영문법 공부도 훨씬 더 재미있어질 테니까."
나의 한국어 입은 얼굴에 달렸지만,
내 영어 입은 가슴에 달렸다.
내 한국어 소리는 염소처럼 울지만,
나의 영어 목소리는 악어처럼 벌리고 소처럼 운다.
영어 목소리는
경직된 얼굴과 목 근육을
뚫고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술 먹고
영어 하면 영어가 더 자연스럽다고 했나 보다.
영어 목소리는
게으른 근육이 만들어내는 소리.
이젠 주변 미국 사람들이 하는 말소리에서 진동과 깊음이 느껴진다. 미국 중학교 7학년 ENL교사인 킴의 목소리에서도 바리톤과 같은 낮은 피치와 공명음이 들린다. 영어학습자 학생들은 소리가 머리에서 진동되어 나오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아이들의 소리가 가슴속에서부터 진동되어 나온다는 게 느껴진다.
영어로 말할 때는 세상을 다른 울림으로 울려줘야 한다. 한국말이 세상을 진동시키는 것과 영어가 세상을 진동시키는 것은 다르다. 같은 공기를 마셔도 이 공기를 어떻게 내뱉는지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울리고 반응한다.
예전에는 한국식 억양이 묻어 나오는 나의 영어발음에 자격지심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내 영어발음을 어떻게 판단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영어목소리가 세상을 울리는 방식에 집중해 본다.
공기 속 원자에게 주는 열기와 진동의 차이. 한국어와 영어 목소리를 찾아가면서 난 세상을 더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다.
수업관찰을 위해 중학교로 가는 오늘 아침.
계속 영어를 영어발성대로 말하고 생각하려니 머리에 쥐가 났다. 한국말이 그리웠다.
'한국말을 영어발성으로 말해볼까?'
영어식 발성으로 생각나는 데로 이것저것 한국말을 내뱉었다. 내 목소리가 훨씬 영어목소리에 가깝게 들린다. 완벽함이 아닌 용기 내서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혜가 떠올랐다.
우린 완벽함에 덜 집중하고 용감하게 살아가는데 더 집중해야 한다. 나의 영어목소리를 찾는 여정도 그래야 한다. 내 영어 목소리가 완벽하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진짜로 용감하게 나만의 영어목소리를 찾아나가야 한다. 용감하다는 것은 무섭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더 시도해 보는 것이다. 내 목소리의 완벽하지 못함에 슬퍼하고 자책하지 말자. 실패하기 쉽고 위험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전해 보는 것이 완벽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