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벌리가 어머니를 학교에 모셔왔다. 버지니아주에 사는 동생 가족이 아침에 비행기 타고 집으로 가는 것을 배웅해 주고 베벌리와 어머니는 곧바로 베벌리가 일하는 학교로 왔다고 한다. 무척 젊고 활달하며 에너지 넘쳐 보이시는 분이다.
어머니는 대학교 갓 졸업한 22살에 중학교 가정교사로 고용되셨다. 그것도 학기 시작하기 3일 전에.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만 살아왔던 어머니는 각종 호르몬이 넘치고 문제행동만 일삼는 중학생들에게 첫날부터 시달렸다. 그래서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셨다. 중학생 아이들에게 크게 데셨다. 그 심정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나의 교직 첫 2-3년도 우울증으로 가득 찬 나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베벌리와 베벌리 동생을 낳은 이후에는 고등학교에서 잠깐 6개월 교사로 일했다. 고등학생들은 중학생들보다 훨씬 가르치고 쉬웠으나 교사로서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한 어머니는 결국 병원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을 얻었다.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닌 어머니는 간호사들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조하는 일들을 하면서 은퇴 후에 아무런 할 일 없이 시간만 흘러가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많은 병든 어르신들을 보았다. 그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다짐했다. 나는 은퇴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2019년 간호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간호 대학에 들어갔다. 혼자서 독학해서 입학시험도 한 번 만에 잘 치르고 공부와 직장을 병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때론 공부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첫째 딸 베벌리는 '한번 시작한 거니 끝까지 해야지'라며 절대 포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20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직장생활이 너무 버거워지자 어머니는 직장을 포기하고 공부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전 시험을 봤고 합격하여 간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옆집에 사는 40대 이웃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며 어머니의 합격을 축하해 줬다.
내일은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예전에 다니던 병원에서 연락을 주었고 주어진 기회는 절대 박차지 않는 어머니이기에 단숨에 잡았단다. 그리고 나에게 물으신다.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베벌리와 같은 박사과정에 있긴 하지만, 아직 이 박사과정을 무사히 다 끝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감이 없는 나는 '모르겠어요. 박사를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왕방울만 하게 눈을 부릅뜨며 어머니는 화들짝 놀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그래요."
"이걸 그만두면 뭐 할 건데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죠. 제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그 꿈을 이룰 수도 있고요."
"현모양처 좋죠. 하지만 그것도 몇 년 못 가요.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해요. 저는 그 옛날 중학교 교사를 포기했던 그때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어요. 그것 때문에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죠. 하지만 간호사 자격증을 따면서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았던 글귀가 있어요."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수많은 명언들 중에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글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써서 나에게 준다.
이 박사과정을 포기하고도 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겠지만, 다른 나라까지 와서 시작한 이 길을 어떤 이유가 되었던지 포기하지 마라고 어찌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지 귀가 따가워질 정도였다.
학교가 끝나고 어머니와 헤어지며 집에 오는 길에 어머니의 말씀을 다시 되새긴다. 그냥 들으면 진부하고 누구나 어디선가 한번 들어봤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살아오신 분의 입으로 그 열정으로 듣는 그 말은 새로웠다.
난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번 시작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올라가야 할 산을 보지 말아야. 한 발자국 내딛는 거에만 집중해요."
자신감 부족, 게으름, 무능력함. 포기해야 할 이유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포기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포기하지 말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