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숨쉬기조차 귀찮은 때가 있다. 편안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이 짜증 나게 싫을 때가 있다. 이런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재미있는 책만 쭉 읽어보자.'
그것도 한 시간을 채 못 간다. 엉덩이가 괴이고 목이 아프고 손목이 에린다.
라디오 틀어놓고 그냥 멍하니 의자에 앉는다. 오늘은 라디오 음악 선곡이 내 취향이 전혀 아니다. 10분 정도 듣다가 그냥 꺼버린다. 윙윙 돌아가는 천장 선풍기 바람 소리만 들린다.
잠도 너무 많이 자서 잠도 안 온다. 푹신한 매트리스도 돌 처럼 느껴진다.
뭔가 해야 하는 건 알지만 전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이것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지난 3주간 매일 집 근처 초등학교에 봉사 활동하는 생활을 하다 봉사활동이 끝나니 나의 규칙적인 생활도 멈춰버렸다. 30-40년간 한 직장에 다니다가 퇴직한 사람의 마음도 이런 비슷한 심정일까. 그들의 마음은 나보다 더 심할 것이다. 3주와 30년의 차이처럼 말이다.
그냥 며칠 편하게 쉰다고, 휴가 얻은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불안한 내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여유를 여유답게 부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진다. 나 자신을 싫어하는 나 자신은 더욱더 싫어진다.
인간은 아무것도 못하고는 살 수 없는 저주받은 존재인가 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사람들도 반드시 뭔가는 하는 법이다. 그 일이 다른 사람 눈에는 하찮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악마와 치열한 논리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보통 그들의 우울증을 더 심각하게 할 뿐이다.
우울증이 도발했나 보다. 바쁠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 잊고 지냈는데 시간이 남아 도니 슬그머니 내 머리와 마음의 모든 공간을 떡 하니 차지하고 들어섰다. 우울증 진단이나 우울증 약을 처방받은 적은 없으나 우울증은 나와 평생을 함께 하는 아이다. 암에 걸린 사람은 절대 암에서 해방될 수 없고 암과 함께 잘 사는 것이 남은 인생의 목표이듯이 나는 어느 순간 우울증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우울증이 찾아올 때마다 그 우울증을 지긋이 관찰하려는 노력을 한다. 내 마음이 이렇구나.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그리고 이런 마음 때문에 불안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런 갖가지 마음을 가져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임을 알려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마음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만 가지 감정들은 그저 그냥 느껴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그냥 나의 마음을 관찰한다. 그 동안 뭐가 바빴다고 내 마음을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했을까. 성공, 열정, 경제적 여유, 남의 시선, 나의 목표 등 각종 이유 때문에 내 진짜 마음을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파업을 선언했다. 내 마음이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