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일상
여름날, 옥수수밭에서
시골에서 보내는 여름휴가의 매력은 무엇보다 아침 산책에 있다. 나릿골로 향하는 길은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었다. 나릿골의 아침은 유난히 깊고 느긋하다. 하늘은 투명하게 열려 있고, 풀잎 사이로 스며오는 이슬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우리는 자주 비슷한 산책길을 택하지만, 그날따라 남편과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유별나게 가벼웠다. 밭길 끝자락에서 여느 때처럼 푸른 옥수수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넓고 울창한 그 밭머리에는 노련한 손길이 만든 질서와 자유로움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밭 어귀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 계신 아주머니가 우리 눈에 띄었다.
나는 평소처럼 세상 구경하듯 느린 속도로 밭길을 따라섰다. 문득 마음속에 작은 소망이 일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딴 옥수수를 먹어보고 싶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그 바람이 나를 아주머니 앞으로 이끌었다.
“아주머니, 혹시 옥수수 좀 팔 수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익숙하게 손사래를 쳤다. “이런 건 사먹는 게 아니에요. 시장 나가서 사세요.”
남편은 분명 내 귀에 속삭였다. “옥수수 무거워. 그냥 구경만 하자.”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밭에서 바로 딴 게 제일 맛있지 않아요?” 반쯤 농담처럼 말을 건네자, 아주머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한참을 이렇다 저렇다 하다가 결국 아주머니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이만 원어치나 사? 만 원에 열 개 줘. 이왕이면 더 가져가.”
나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마음으로 거래를 하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산책이라 지갑을 챙기지 않아 현금이 없고, 아주머니는 계좌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잠시 망연히 서 있었고, 아주머니도 민망한 듯 머리를 긁으셨다.
그때 밭 옆에 있던 동네 분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제 계좌로 이체하시고, 제가 현금 드릴게요.”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마을 특유의 따뜻한 중재였다. 덕분에 나는 동네 분의 계좌로 부랴부랴 송금을 하고, 그 분이 아주머니께 현금을 건넸다. 작고 느린 거래였지만, 그 안엔 넉넉한 인정이 이미 흐르고 있었다.
옥수수를 담은 비닐봉지의 묵직함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주머니는 알이 굵은 옥수수 하나를 더 얹어주시며 “이건 서비스야. 직접 따니 맛있을 거야.”라고 말해주셨다. 게다가 옥수수뿐 아니라 고추 몇 개도 보태주셨다. 선한 손길을 건네받으니 하루가 갑자기 푸짐해진 느낌이었다. 동네 인심, 시골의 후한 덤이 기분 좋은 아침을 완성했다.
남편은 그제야 무게를 실감한 듯, 봉지를 들었다가 이내 “이거 이렇게 무거운지 몰랐네”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수확의 무게가 내심 즐거웠다.
집으로 향하는 길, 무려 1km가 넘는 골목을 남편이 옥수수 봉지를 머리에 이고 걸었다. 연신 힘들다, 무겁다 하면서도 이따금씩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남편, 은근한 불평 속에도 일정한 책임감과 배려가 묻어났다. 우리가 함께 걸은 그 아침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조금은 투닥대고 조금은 웃으면서 서로의 마음을 다시 어루만지는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바로 압력밥솥에 옥수수를 넣었다. 물을 채우고 뚜껑을 닫으며, 남편은 또 한마디 한다. “다음엔 제발 가볍게 좀 사라.” 나는 피식 웃으며, “이 맛을 기억해야 돼. 밭에서 갓 딴 걸로 찌는 거야.”라고 답했다. 곧 부엌엔 고소한 향내가 가득 번졌다.
익은 옥수수를 꺼내 하나 건네니, 남편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베어 물었다가 이내 얼굴이 환해졌다. 곡식의 알이 톡톡 터지며 입 안을 채웠다. 둘이 마주 앉아 처음 베어 문 옥수수의 단맛을 음미했다. 도시의 편리함도, 매끄러운 거래도 이 맛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남편과의 의견 차이를 떠올렸다. 때로 작은 사소함들이 우리를 멀게도, 가깝게도 하겠지만, 결국 함께 짊어진 옥수수 봉지처럼 그 모든 일상은 우리의 운명이 되어 쌓일 것이다. 이처럼 ‘옥수수의 무게’는 단순한 곡식의 중량을 넘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함께 짊어질 일상의 무게를 상징한다. 때로는 버겁고 투덜거리고 싶지만, 그 무게를 나눠 들 때마다 우리는 더 단단해진다. 밭에서 얻은 작은 수확이 마음속에 단단한 추억으로 쌓이고, 매년 여름이 찾아올 때마다 다정한 그날의 풍경을 불러올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나릿골 (옥수수밭->상단 바람주차장 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