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여름 휴가

(수필) 소소한 일상 속에서 부부가 함께하는 여름휴가

by 불씨

여행의 시작 ― 바다 곁의 집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휴양지를 찾는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곳은 삼척의 세컨 하우스다. 숙소라기보다 또 하나의 집,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의 복잡한 일상을 떠나, 바다를 곁에 둔 이곳에서 열흘을 보낸다. 낮 기온이 30도를 넘지만 바람 속에는 바다의 시원함이 배어 있다. 더위조차 한결 부드럽게 다가온다.

이번 여행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부부가 함께하는 여름휴가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화려한 일정은 없다. 대신 매일의 식탁, 바닷길 산책, 작은 독서의 순간들이 삶을 채운다. 이 단순함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휴식이다.


바다가 주는 선물, 수산시장의 보물들

삼척의 여름은 번개시장에서 시작한다. 오분거리의 항구에서 새벽에 잡아올린 생선을 3시간만( 6시부터 9시까지) 어부 가족이 판매하는 즉 자연산 직거래 새벽 수산시장이다. 새벽 무더위 속에서도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는 생생하고, 그 앞에 펼쳐진 바다의 선물들은 눈부시게 싱싱하다. 청어의 은빛 비늘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고등어는 마치 바다의 보석처럼 반짝인다.


"오늘 뭘 해먹을까?" 하는 아내의 물음에 나는 늘 "우리가 좋아하는 걸로" 답하지만, 사실 우리 둘 다 이미 시장을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메뉴를 그려보고 있다. 곰치국감으로 쓸 곰치 한 마리, 회로 광어, 그리고 바다 냄새가 진하게 밴 멍게까지. 이것들이 우리 부부만의 여름 식탁을 완성하는 재료들이다.


외식 한 번 없는 열흘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내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요리의 마법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번개시장에서 현지에서 잡은 싱싱한 대구, 가자미, 오징어, 도로묵, 문어, 새우 등 재료들이 우리 세컨하우스의 작은 주방에서 한 끼 한 끼 정성스러운 밥상으로 변해간다. 이보다 더 사치스럽고 특별한 식사가 또 어디 있을까.


장날의 소소한 즐거움

삼척의 장날은 또 다른 축제다. 감자덕의 쫄깃한 식감과 달콤한 과일들, 할머니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떡과 바삭한 파전까지. 인근 밭에서 직접 따온 생 옥수수는 그 자체로 여름의 맛이다. 집에서 옥수수를 삶는 동안 부엌에 가득 퍼지는 달콤한 향기는 어린 시절 여름의 추억을 소환한다.

장터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온화한 미소, 흥정하는 재미, 그리고 "서울서 오셨어요?" 하며 건네는 따뜻한 인사.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부부의 여름휴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대형마트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기가 장터에는 있다.


매일 다른 길, 같은 마음으로

새벽에 시작하는 해안길 산책은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만든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 수도 있지만, 아침 바다의 청량함 앞에서는 모든 피로가 사라진다. 저녁에는 노을을 바라보며 걷는 바닷길이 우리를 기다린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하늘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경 앞에서 말없이 서로의 어깨에 기댄다.

광진 해안길을 걸을 때면 바다가 우리를 맞이한다. 파도소리가 우리의 발걸음과 리듬을 맞추고, 바닷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어루만진다. 어느 날은 나릿골로, 어느 날은 봉황산으로 향하지만 언제나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 길이다.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지만, 이렇게 매일 함께 걷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서울에서는 각자의 일상에 쫓겨 사는 우리가, 삼척에서만큼은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 아내가 예쁜 조개껍질을 주우면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내가 신기한 바위를 발견하면 아내도 함께 감탄한다.

봉황산에서 내려다보는 삼척 시내의 모습, 나릿골에서 만나는 작은 들꽃들, 광진 해안길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 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 다른 풍경을 선사하는 것이 자연의 신비로움이다.



물속에서 찾는 보물, 바다의 추억

정라진 해안에서의 물놀이는 우리 부부에게 동심을 되찾아준다.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서로 물장난을 치는 모습은 신혼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날, 진짜 보물은 노루메기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해루질(자맥질)로 직접 잡는 성게의 오렌지빛 알은 바다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까면서 "이게 정말 우리가 잡은 거야?" 하며 신기해하는 아내의 표정이 사랑스럽다. 자맥질하여 바다속에서 창으로 찌른 놀래미는 그날 저녁 우리 식탁과 대화의 주인공이 된다.


이곳은 정말 우리만의 프라이빗 비치다. 이번에만 세 번이나 갔지만 여전히 설레고, 여전히 새롭다. 다른 관광객들은 찾지 않는 이 작은 해안에서 우리는 진짜 바다를 만난다. 진입로도 없고 바위뿐인, 자연 그대로의 바다 말이다.


책과 한 잔의 커피 그리고 평창음악제

서울 도서관에서 빌려온 다섯 권의 책들은 우리 여행의 조용한 동반자다. 삼척 도서관에서 보내는 오후의 시간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독서실에서 각자의 책에 몰입하는 시간. 가끔 눈을 들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달콤하다.


조각공원의 마린데크에서 마시는 커피, 투썸플레이스에서의 달콤한 디저트. 이런 소소한 카페 타임조차 우리에게는 특별한 데이트다.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은 서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사치다.


중간에 다녀오는 평창음악제는 우리 여행의 영혼의 음식이다. 하이든의 런던교향곡, 모차르트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특히 플루트의 청아한 음색은 지금도 귀에 맴돈다. 클래식 음악이 주는 깊은 감동을 아내와 함께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예술적 감수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더운 여름에 음악의 선율이 스며들어, 우리의 휴가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


미로같은 여행, 예상치 못한 발견들

천운사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당황스러움도 이제는 웃음거리가 된다. 물이 없다는 안내판을 보고 아쉬워하지만, 대신 임원 건봉산 휴양림에서 찾은 4km의 산림도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산책길을 선사한다. 계획에 없던 길이지만, 때로는 계획에서 벗어날 때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울창한 임도 숲길을 걸으며 듣는 새소리,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그리고 맑은 공기. 바다도 좋지만 산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치유의 공간이다. 아내는 예쁜 야생화를 발견할 때마다 사진을 찍고, 나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몰래 찍으며 미소 짓는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부부가 같은 속도로 호흡하며 같은 풍경을 나누는 일임을 실감한다.


부부만의 시간, 예상을 뒤엎는 즐거움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이 있다. 10박 11일을 부부 단둘이 보내는 것이 지루하지는 않을까? 서로 싫증내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런 걱정은 완전히 기우다. 오히려 너무 재미있고 알찬 시간이어서 더 머무르고 싶을 정도다.


평소 바쁜 일상 속에서는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깊은 대화들, 서로의 취향을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 그리고 무엇보다 온전히 상대방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부부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내가 해루질하는 것을 신기해하는 아내의 반응도 사랑스럽다. 오래 함께 살았지만 여전히 서로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자주 가지만 늘 새로운 곳

삼척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곳이다. 자주 가는 곳이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길이 좋은지도 잘 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편안하고, 더 깊이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처음 가는 곳의 설렘도 좋지만,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포근함과 안정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매번 같은 곳을 가도 계절이 다르고, 날씨가 다르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다르다. 이번 여행에서는 예전보다 더 여유롭게, 더 깊이 삼척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성급함보다는 여유로움을 추구하게 된 것일까.


소소하지만 특별한 우리만의 여행법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소소한 여행일 수도 있다. 화려한 관광지를 다니지도 않고,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가장 특별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다.


현지에서 나는 싱싱한 재료로 삼시세끼를 해결하고, 매일 바다길을 걸으며 자연과 교감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문화적 감수성을 키우는 것. 이런 여행 방식이 우리 부부에게는 완벽하다.

같은 풍경을 보며 함께 감탄하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함께 만족해하고, 같은 길을 걸으며 함께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 이보다 더 우아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 또 어디 있을까.


삼척에서 보내는 열흘간의 여름은 이렇게 우리 부부에게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선사하고 있다. 내년 여름에도, 그 다음 여름에도 우리는 또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새로운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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