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하장면에서 만난 자연의 선물
늦여름의 끝자락, 하장면에서 만난 자연의 선물
늦여름, 삼척 하장면으로 떠났다. 해발 700미터 고지대에서 선사하는 서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마시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 하나로 떠난 길이다. 예상치 못한 선물 같은 하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지대에서의 시원함은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단숨에 깨워주었다. 차로 오르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은 매번 새로운 그림을 보여준다. 높고 푸르른 산세,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이 맞닿은 순간, 여름의 기억들이 고지대의 바람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기분이다. 폭염에 지친 몸과 마음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재충전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도 새롭게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바람이 머무는 땅, 녹색의 바다
700고지 댓재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공기의 차가운 감촉이 달르다. 마치 계절이 가을로 넘어간 듯, 여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우리가 도착한 목적지는 최근 생긴 임산물 체험장이었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길 양옆으로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이다.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길이 만든 이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이 풍경이 주는 감동은 언제나 새롭다. 규칙적으로 심어진 채소들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아름다움과 자연의 무질서한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곳은 거대한 녹색의 바다다. 배추, 양배추, 브로콜리가 지평선 끝까지 물결치듯 펼쳐져 있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 담긴 채소들은 각기 다른 초록빛을 뽐내며 대지의 풍요로움을 증언하고 있다. 차에서 내려 밭둑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말없이, 발밑의 흙냄새와 눈앞의 광활한 풍경에 온몸을 맡긴 채였다. 일상의 번잡함과 한여름의 무더위가 서서히 발끝 아래로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뜻밖의 수확, 줍줍의 기쁨
추수가 끝난 브로콜리 밭 한쪽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미처 거두지 못한 몇 송이의 브로콜리가 흙 위에 보석처럼 놓여 있다. 누군가에게는 버려진 것이었지만, 우리 눈에는 대지가 건넨 선물처럼 보였다. 아내는 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이것이 서리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마음을 정했다. 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지만, 수확이 끝난 밭에서 남겨진 이삭을 줍는 일은 예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너그러운 관용이었다. 우리는 그 옛사람들의 마음에 기대어 허리를 굽혔다.
‘줍줍’. 요즘 유행하는 이 단어가 이토록 정겨운 의미를 담고 있을 줄이야. 흙을 털어내며 브로콜리를 몇 송이 주워 담는 동안, 우리는 어린 시절 소꿉놀이라도 하는 듯한 기쁨을 느꼈다. ‘훔친 열매가 더 달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훔친 것이 아니다. 신선한 채소 그 이상의 의미, 바로 자연이 우리에게 건넨 작은 위로와 소박한 행복이다. 집으로 돌아와 데친 브로콜리를 먹으면서 그 맛은 어떤 산해진미보다 깊다. 단순히 신선한 것만이 아니다. 그 브로콜리는 시중에서 사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달콤하고 싱그러우며, 씹을수록 진한 맛이 살아났다. ‘훔친 열매일까, 주운 선물이었을까?’ 속으로 농담을 던지며 웃음을 나누었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직접 자연의 자락에서 건져 올린 선물처럼 생생한 맛이 식탁 위에 놓였다는 사실이다. 그 안에는 하장면의 서늘한 바람과 눈부신 햇살, 아내와 함께한 고즈넉한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간이 멈춘 자리, 세 시간의 여유
임산물 체험장 내 작은 카페에 들렀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이 그리워서였지만, 그곳의 서늘하고 평화로운 공기는 쉽게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커피 한 잔으로는 이 고요와 여유를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각자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녹색의 밭이 펼쳐져 있고, 카페 안에는 은은한 커피 향과 배경 음악만이 흐르고 있다. 아내의 가짜 결핍이란 책은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욕망과 결핍감의 인간 탐구라는 내용이다. 이 고리를 끊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느린 경험, 자연과 인간 관계, 적게 가지고 충분함을 느끼는 삶을 권장한다. 내가 읽던 책은 시공간의 인문학으로 고전, 현대 물리학, 양자역학을 동양의 음양과 불교를 연결짓는 내용이다. 세상은 불확정적이고 서로 연결되었다. 서로 책장만 넘겼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 공간에서 서로 연결되는 그 순간, 우리는 느린 경험과 자연, 중첩과 얽힘의 교감을 나누고 있다. 그렇게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여름의 무더위를 씻어내고, 텅 빈 마음에 맑고 서늘한 기운을 가득 채운 충전의 시간이 되었다.
삶이 주는 교훈
저녁 무렵, 서산으로 기우는 해가 고원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그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 앞에서는 어떤 말도 부족하다. 그날, 삼척 하장면에서의 하루는 자연이 일러준 인생 수업이기도 하다. 기온 몇 도 낮은 고지에서 우리는 진정한 '시원함'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온도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평온함이다.
삼척 하장면에서의 짧은 하루는 고랭지 채소의 싱그러움을 알려주었고, 부부가 함께하는 고요한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했으며, 행복은 크고 화려한 곳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발견 속에 숨어 있다는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밭두렁에 남겨진 브로콜리처럼,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장 귀한 것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기억은 또 다른 여름, 마음이 소란해지는 날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되어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