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250511 18:43

by 베짱이 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나는 글쓰기를 이리 좋아하면서, 소설을 그리 많이 읽으면서, 정작 소설 쓰기는 어려워했다.


2021년 가을, 인스타그램에서 어느 작가님을 만났다. 계절이 바뀌고부터 전주에서 서울 망원동까지 글쓰기 강의를 다녔다. 강의만을 위해 그 먼 거리를 오갔다. 5주 차 과제에서 주인공을 구상해 보라는 작가님 말씀에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방송에서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다 말하는 사람들은 증언했다. 정보를 모으고 인물을 충분히 구체화하면 마음속에서 그가 절로 움직여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는데. 흥미진진한 줄거리나 복잡한 갈등을 일일이 설계할 필요가 없었다는데. 글쓰기가 쉬웠다는데. 나에게는 그런 주인공이 없었다. 상상력이 모자라다 여겼다. 그나마 듣고 있던 폴킴 노래에서 착안해 녹차 라테를 닮은 남성을 겨우 꾸며냈다. 노트에 부드러운 녹색 거품만 남았다.


꾸며내기가 어려운 것은 모국어든 외국어든 마찬가지였다. 2024년 1월, 캐나다에서 창의적 글쓰기 수업을 수강했다. 내로라하는 대학 강의였다. 첫 몇 주차, 창의성에 관한 특강이나 묘사 연습이 재밌다고 느꼈다. 과제가 수월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학기가 시작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중간 과제가 주어지자 나는 압박을 견딜 수 없었다.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주변에 아이디어를 묻고 다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500자 단편을 겨우 쥐어 짜냈다. 죽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영어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과제는 더 절망적이었다. 시 세 편이나 논픽션 한 편을 써내야 했다. 3월 19일까지. 교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분명한 평가 기준을 제시하고, 참고할 작품을 제공하고, 개별 면담을 여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하등 도움되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결국 과제와 수업을 하나씩 포기했다. 3월 10일, 하루 만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은 나다. 나여야만 한다. 심채경이 말했다. 김연아가 말했고, 김연경이 말했다. 미아가 말했고, 그레타가 말했다. 완다와 블랙 위도우가 말했다. 나희도, 국연수, 지해수, 차현이 말했다. 아이유, 블랙핑크, 전소연, 태연이 말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도 노래하는 수많은 싱어송라이터는 말한다. 나는 그들처럼 자신감 넘치는 여자를 동경한다. 아니,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 한번 꽂힌 일은 어떻게든 이뤄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라는 이야기는.

keyword
작가의 이전글MB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