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포인세티아가 눈에 들어온다.
감기 때문에 병원에 들렀는데 병원 입구에 포인세티아 화분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있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알 수 없이 설레고 들뜨는 것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하다.
성탄의 의미를 잘 몰랐지만 아주 꼬맹이 때인 무주 산골에 살 때부터 그날이 축복받고 경사스러운 날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우리 고향 그 작은 산골에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지금처럼 번듯한 교회가 아니라 헛간 비슷한 공간이었지만 크기는 좀 컸고 학교처럼 기다란 의자와 따뜻한 난로가 있었던 그 작은 예배당
그 예배당에 나는 꼭 한 번 가보았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진 초저녁, 우리 고향은 산골이라 눈이 참 많이도 왔었다. 눈이 한 번 오면 어른 무릎이 빠질 정도로 엄청나게 내렸다. 교회라면 터부시 했던 우리 집은 식구 중 누가 아프면 병원이나 약국 대신 당골 네가 드나들고 아침마다 제일 일찍 길어온 물을 떠 부뚜막에 올려놓는 것을 집안을 지키는 최선을 여겼던 엄마도 그날만큼은 교회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물론 아직 나는 학교도 다니기 전 꼬맹이였으므로 잘 몰랐지만 교회에서 연극을 하고 과자를 비롯한 선물을 나눠준다는 솔깃한 말에 언니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덩달아 흥분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요즘 같으면 수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1960년 대는 그렇지 못했다. 선물이라는 개념조차도 몰랐었고, 새 옷을 얻어 입는 것도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뿐이었다. 그런데 선물을 준다니 그것도 시골 아이들이 먹기 힘든 맛있는 과자와 학용품을 말이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렸던 언니와 친구들은 크리스마스 전날 이른 저녁을 먹고 안성장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예배당으로 향했다. 물론 나도 함께 갔다. 누군가 깨끗이 비질해 놓은 논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흥분되고 기대되었는지 모른다.
관솔 가지에 불을 붙여 높이 치켜든 남자아이의 뒤를 따라 걷는 우리들은 마냥 신이 났다.
아버지가 눈길이 미끄럽다며 고무신 위에 가는 새끼를 꼬아 친친 동여매 주어 미끄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흰 눈뿐이었다.
예배당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서 펄펄 함박눈이 내렸다. 시시덕거리며 앞서 걷는 언니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리는 눈에 관솔불은 퍼지직 거리며 흔들렸지만 꺼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머리 위에 하얀 눈 모자를 쓰고 예배당에 도착해 예배당 문을 드르륵 밀고 들어갔을 때,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한 예배당은 따뜻했고 환한 촛불 아래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연극이 진행 중이었다.
보이는 것 모두가 성스럽게 보이던 그날의 추억들!
나는 그 낯선 분위기가 주는 신비로움에 흠뻑 매료되었다. 우리와 다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연극이 끝나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을 속으로 따라 부르면서 그들이 천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졌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모두 선물 자루 한 개씩을 들고 있었다. 선물 주머니 안에는 튀밥 한 봉지, 사탕 몇 개,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밤이 깊어 캄캄한 밤길을 걷느라 관솔 가지는 두 개로 늘어났고 우리는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손과 온몸과 손발이 꽁꽁 얼었지만 우리는 너무 행복했었다. 고향을 떠나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그때 크리스마스이브 날 예배당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추억은 마치 천상의 세계에 다녀온 것처럼 행복한 꿈을 꾸게 해 준다. 그때 함께 함박눈을 맞으며 관솔 가지 불빛에 의지해 예배당을 함께 걷던 그 언니와 오빠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