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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Jan 05. 2023

제일모직 505 털실의 추억 / 외삼촌과 어머니

삶의 단상 


장미 505호 털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장미 505호는 제일모직이 만든 털실 이름이다. 내 어린 시절 막내 외삼촌이 빠지면 내 이야기는 완성되기 힘들 만큼 외삼촌의 배역은 독보적이었고, 때로는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장롱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내의가 있다.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내의다. 문득 가난했던 어린 시절 생각에 잠시 일손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거기 울 엄마가 그리고 외삼촌이 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집 형편은 더더욱 힘들어졌다. 내의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그해도 무척 추운 겨울이었다. 아니 어렸을 때 겨울은 대부분 추웠던 것 같다. 어느 수필가의 이야기처럼 어린 시절이 유달리 춥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처럼 변변한 옷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말이 맞은 거 같다.


변변한 내의는커녕 외투도 없던 그 시절.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졸지에 6남매의 가장이 되신 어머니, 어머니는 행상을 시작하셨다.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한 때는 엄동설한이었다. 작고 왜소한 어머니가 한석봉 어머니처럼 떡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철없는 나는 어머니가 목판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떡장사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행여 누가 알까 부끄러웠던 것이다. 마흔여섯의 적지 않은 나이에 여섯 명의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엄청난 용기를 내었을 어머니보다 내 체면이 우선했을 만큼 나는 이기적이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떻게 떡장사를 시작할 생각을 그때 하셨느냐고?


그때 엄마는 긴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을이 되자 남들은 김장을 하느라 분주했지만 우리는 김장은커녕 끼니도 걱정해야만 했다. 혼자 걱정을 하던 어머니는 작은 아버지 댁을 찾아가셨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작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리 가족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거듭하셨었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병든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9살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부모님을 봉양하신 효자이셨다.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만주며, 일본 탄광에까지 가서 일을 했고, 그 돈으로 아버지의 세 동생들이 결혼할 때 집과 전답을 주어 분가시킨 작은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엄마가 작은 아버지 댁을 찾아갔을 때, 마침 작은 아버지 댁은 김장을 준비하는지 마당에 배추며 무를 잔뜩 쌓아놓았더란다.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보고 반가워하시며 말씀하셨다.


"에고, 마침 잘 오셨네요. 어제 금용이네 시골에서 고추며 마늘 잔뜩 가지고 왔어요. 큰집 나눠주려고 많이 가지고 왔나 봐요."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작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셨고, 김장을 하느냐고 물었단다.


그 말에 작은 아버지는 머뭇거리고, 작은 어머니가 나서서 하는 말이


"아이고 형님, 김장은 무슨 김장요. 저거 팔라고 사 온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작은 아버지를 믿었는데, 이 사람을 믿고 있다가 내 자식들 다 굶어 죽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바쁜 일이 있다며 작은 아버지 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더란다. 


싸락눈이 내리는 미끄러운 길을 고무신 신고 내려오면서 울고 또 우셨던 어머니... 한참을 걷다가 멍하니 길에 서 있었단다.


내가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떻게 해서 아이들 굶기지 않을까? 그러나 막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부자는 아니었지만 끼니를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1969년 이 시기만 해도 40이 넘은 여자가 돈을 버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군다나 엄마에게는 아직 젖먹이인 늦둥이 막냇동생이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망연히 눈을 맞으며 서 있는데, 어떤 아낙네가 목판을 이고 지나가더란다. 한눈에 보기에 행상을 하는 그 아낙에게 엄마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도 댁처럼 이런 장사를 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묻는 엄마의 눈동자엔 간절함과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그 아낙은 잠시 엄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말하더란다.


"무슨 사정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아줌마같이 약한 사람이 이런 장사를 할 수 있겠어요."


엄마가 할 수 있다고 거듭 사정을 하자 그 아낙은 떡을 만들어 행상들에게 대 주는 떡집을 소개해 주셨단다.


떡 목판 장만한 엄마는 그다음 날부터 목판 가득 개피떡을 이고 떡장사에 나섰다.


그렇게 우리 식구는 굶지 않고 살 수 있었고, 힘들었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 모두가 장한 어머니 상을 타신 어머니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울 엄마는 강했고, 우리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다던가 비관하는 말도 푸념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너무 몰랐다.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 온종일 남의 집과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다리는 얼마나 아팠을지, 사람들의 냉대에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밤늦게 오시는 날은 장사가 안 되는 날이었다는 사실도, 그렇게 미처 팔지 못하고 남겨온 떡이 오히려 반가운 철없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온종일 장사에 녹초가 된 어머니가 저녁을 먹고 쉴 때쯤,


'누님 나 왔어요!'라는 소리와 함께 외삼촌이 마루에 올라서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모두 방으로 들어서는 외삼촌에게 인사를 한다.


"아이고, 뭔 놈의 날씨가 이렇게도 춥대요. 장사는 잘했고요?"


외삼촌은 이불이 깔려있는 아랫목에 손을 넣으며 말한다.


급한 성격으로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있지도 않는 외삼촌은 우리 집에 비해 부자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공장에나 보내 돈을 벌게 하면 좋을 텐데 왜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누님이 고생을 하느냐며 나무라셨다. 우린 그런 외삼촌을 무척 싫어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일찍 장사에 눈을 떠 이재에 밝았던 외삼촌이 장사를 하면서 겪은 일들을 마치 일인극을 하듯 상대방의 말투며 표정 행동까지 흉내 내며 들려주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 겨울 아주 추운 날이었다. 그날 저녁을 먹자마자 밤마실을 온 외삼촌이 바지를 쑥 걷어올리며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누님 이게 뭔지 아오?"


게실(뜨개 실을 당시 우리는 게실이라 불렀다)로 뜬 속바지를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내 보이는 것이었다.


"게실로 뜬 속바지네, 따습겠네. "


"아유, 누님 이게 바로 제일모직 장미 505표 털실이랑 게요. 얼마나 뜨신 지 이걸 입으니 하나도 안 춥당게요."


1960~1970년대 제일모직 장미 505 털실 광고


외삼촌은 제일모직 장미 505표 털실이란 단어에 방점을 찍어 힘주어 말했다.


TV도 없던 당시 우리는 라디오에 열광했고 라디오에서 '장미 505 털실' 선전 광고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장미 505호 털실로 짠 옷을 외삼촌이 속바지로 입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부러운 마음에 보는 외삼촌의 회색 속바지는 윤이 자르르 나 보였다. 


당시 털실로 옷을 만들려면 며칠 동안 손으로 뜨개질을 하여야 했는데, 전주 남문시장에 가면 편직 기계가 있는 가게가 있어 하루면 옷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일 스웨터를 맞추려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 보고 같이 가자는 것이다.



"나는 못 가. 우리 형편에 그 비싼 스웨터를 맞춰 입을 수 있간디, 동생이나 가서 맞춰서 뜨뜻하게 입고 다녀."


엄마가 힘없이 말하자, 외삼촌이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말씀하셨다.


"하이고 누님, 내 스웨터만 맞추려면 내가 뭐 하려고 누님한테 이런 말을 한당가요? 애들 먹여 살리느라 누님이 추운 한 데서 매일 떨고 다니는데 어떻게 나 혼자만 맞춘데요. 그러니 암말 말고 내일 남부시장에서 만나요. 나 맘 변하기 전에."


우리는 외삼촌의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앉은자리에 풀도 안 날 만큼 구두쇠로 소문난 외삼촌이 엄마를 생각할 때가 다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그다음 날 엄마와 외삼촌은 나란히 전주 남부시장 편물점에 가 스웨터를 맞추고 오셨고, 주문이 밀려 며칠 후 스웨터를 찾아오셨다.


외삼촌 속바지와 같은 제일모직 장미 505표 털실로 짠 엄마의 회색 스웨터, 외삼촌이 엄마에게 선물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던 스웨터! 지금 생각하면 당시 외삼촌은 어머니를 위해 거금을 지출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 스웨터를 참 오래도록 아끼고 또 아껴 입으셨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외삼촌이 맞춰준 그 회색 스웨터!


해마다 겨울은 우리에게 혹독한 추위를 선사했지만, 그 겨울은 그 어느 해 겨울보다 행복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외삼촌과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통화를 하셨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해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이따금 아무 생각 없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가 두 분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흠칫 놀랄 때가 있다.


그리운 외삼촌과 어머니, 그리고 제일모직 장미 505표 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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