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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Jan 19. 2023

첫눈의 추억 / 아다모 눈이 내리네

삶의 단상 


내가 사는 서울에 눈이 내린다.


음악 방송 DJ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목동에 눈이 내리고 있다는 말에 서둘러 베란다로 나가보니 주차장 위로 펑펑 눈이 쏟아지고 있다.




그것도 함박눈이 내린다.


음악방송국과 같은 지역에 사는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내가 사는 지역의 날씨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첫눈


어렸을 때부터 첫눈이 오는 날은 마냥 좋았다.


첫눈은 대개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학교에 있을 때 내렸는데,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교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와~ 하는 함성이 쏟아지고 그때 창밖을 보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우리는 저마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랐고, 평소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선생님도 수업을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기억 속 첫눈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나는 해마다 첫눈을 기다렸다.


온 듯 만 듯 한 그런 눈보다 소담스럽게 쏟아지는 함박눈을 기다렸다. 첫눈이 내릴 때 만나기로 한 사람도 없으면서 그냥 이유도 없이 말 그대로 그냥 무작정 기다렸던 것이다.


내 첫사랑은 어설펐고, 특별한 추억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세월이 흘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나는 그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때였다.


회사에서 일찍 퇴근을 한 어느 날, 버스를 막 타려는데 첫눈이 내렸다.


펑펑~ 말 그대로 함박눈이 내린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사명감에 허둥대다 그 사람을 생각했고 공중전화기로 다가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면서 만약 그가 전화를 받는다면 앞으로 그를 만날 것이며, 만약 부재중이어서 만날 수 없다면 그와는 끝이라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수동식 다이얼은 속도가 더뎠고 뒤이어 수화기 속에 전해지는 전화벨 소리에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두 번의 전화벨 소리가 멎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시크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나 여기 을지로에 있는데요."


"어? 이 선생이 지금 을지로에 와 있다고요?"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곧 나갈게요. 그렇지 않아도 나 이 선생한테 줄 선물이 있는데...."


선물?


내게 선물을 준다고.


내리는 첫눈처럼 내 마음은 더욱더 부풀어 올랐다.


흰 눈만큼 환한 얼굴로 그는 내가 서있는 공중전화 앞에 나타났고, 연신 싱글거리면서 근처 다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그가 들고 온 서류 봉투에서 한 장의 사진과 원고를 꺼내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선물!"


그가 내민 사진과 원고에 눈이 머문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사진은 두 남녀가 마주 보며 서있는 조각상이었고, '연가'라는 시였다.


모 잡지의 편집장인 그가 신년호 특집 첫 장에 자신의 시를 실기로 했다며, 세상에 이런 선물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하는 듯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내게 그는 연신 물었다.


" 이 선생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 생각으로 밤잠을 설쳤는데...."


그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기대했던 선물은 장갑이나 목도리였는데... 뜬금없이 '연가'라니...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다방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무거웠고, 그의 얼굴빛은 더더욱 심각해졌다. 앞서 걷는 내 뒤를 말없이 따라오던 그,

첫눈이 내린 을지로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하나같이 눈송이처럼 들떠있다.


한참을 걷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우린 생각이 맞지 않아요. 그러니 안녕히 가세요!"


그 말에 그가 얼떨결에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인다. 그의 큰 눈엔 당혹감과 슬픔이 가득 찼다.


나는 돌아서서 또박또박 걷는다. 슬픔은 그만 느낀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슬펐다.


그때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


나는 가끔 첫눈 내린 날 사람들로 가득했던 국도 극장 앞 도로를 생각한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에는 특히....

그때 그가 만약 내게 연가라는 시를 선물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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