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보리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보릿고개' 그다음이 '보리밭'이란 노래이다.
필자는 다행하게도 보릿고개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지런한 부모님 덕분에 올해 여든다섯 인 큰 언니도 배를 곪거나 잡곡으로 끼니를 때운 일은 없었다고 한다.
보리에 대한 추억은 고향 생활 속에 남아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언니 오빠들이 보리 서리를 하여 불을 피워 보리를 꼬슬려 먹는 일에 동참한 적이 있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까맣게 그을린 보리를 손바닥에 놓고 싹싹 비벼 파란 보리를 입안에 넣고 종달새처럼 키득거리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얼굴은 온통 숯 범벅이 되어 서로를 보며 깔깔 웃던 웃음소리는 아지랑이가 되어 날아올랐다.
당시 밀 농사보다 보리농사를 많이 지어 밀밭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당시 귀한 껌을 만든다며 잘 여문 밀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고 꼭꼭 씹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당시는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실제로 밀을 꼭꼭 오래 씹으면 껌만큼은 아지만 약간의 끈기가 생겼었다. 그렇게 한참 입이 아프도록 씹어도 껌이 되지 않아 뱉어내고 말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주식이 보리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쌀과 보리가 섞인 밥이었지만 보리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가장 큰 소원이 '등 따습고 흰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이었다.
당시 밥 짓는 순서는 지금과 달랐다.
먼저 보리를 학독에 갈아 아시 삶는다. 이렇게 먼저 삶은 보리를 가마솥에 안친 뒤 그 위에 쌀을 얹어 밥을 하였다. 가난한 집과 부잣집의 구분이 쌀을 어느 정도 즉 몇 % 넣는가에 따라 나뉘었다.
더러 쌀과 함께 고구마나 감자 또는 무를 넣어 밥을 짓기도 했다. 고구마나 감자를 선호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양식을 아끼기 위한 방편이었다.
필자도 밥 위에 얹은 고구마나 감자 또는 무를 먹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밥알이 묻어있는 고구마나 감자가 맛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밥에 아주 가끔 넣는 무밥은 정말 싫었다.
우리 집은 보리가 70%, 그 위에 얹은 쌀의 비중은 30% 정도였다. 그렇게 밥을 지으면 쌀밥은 위에 보리밥은 가마솥 밑에 남게 된다. 엄마가 밥을 풀 때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 밥을 가장 먼저 푸는 데, 보리밥이 섞이지 않게 위에서 쌀밥만 골라 공기에 담는다.
그다음,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오빠 밥도 쌀로만 푼다. 8 식구 중 30%인 쌀이 아버지와 오빠의 몫이었으니 남은 쌀밥은 거의 남지 않는다.
언니와 나, 동생들의 밥은 대부분 보리밥으로 채워지고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 봐 위에만 쌀밥을 살짝 덮었다. 나머지 엄마의 밥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다 푼 솥에는 깜밥이 남아있다. 거기에 물을 부어 놓고 밥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안방에서 밥을 먹는 동안 가마솥의 숭늉은 남아 있는 잔불로 끓는다.
아버지와 오빠가 겸상으로 따로 식사를 하고 언니와 나를 비롯한 동생들과 엄마가 둥근 소반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그러나 첫 술을 뜨자마자 드러나는 보리밥,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아버지와 오빠의 쌀밥을 부러운 듯 바라본다.
눈치 빠른 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고 얼른 아버지 밥뚜껑에 흰쌀밥을 퍼 내 앞에 놓으면서 내 밥그릇을 가져간다. 그러면서 엄마를 나무라신다.
"밥을 왜 이렇게 퍼는 거요. 다 똑같이 섞어 푸라니깐."
나는 그런 아버지가 정말 좋았다.
물론 어머니는 그런 내게 아버지 몰래 눈을 흘기면서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이렇게 보리 쌀밥을 먹는 것은 아니었다. 생일날이나 명절 때는 흰쌀밥을 먹었다.
눈처럼 흰쌀밥과 고깃국은 그런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흰쌀밥으로 밥을 지으면 깜밥도 과자보다 더 맛있다. 오빠가 누룽지를 좋아하여 우리는 숭늉이나 먹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당시 모두가 그토록 소망하던 흰쌀밥에 고깃국을 거의 매일 먹고산다. 그만큼 풍요로워진 것이다. 당시 가장 큰 소원을 모두 이룬 셈이다. 그렇다면 행복해야 할 텐데, 그 곤궁했던 시절이 더 행복했었다고 느끼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보리는 인류가 재배한 가장 오래된 작물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지금부터 7000∼1만 년 전에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을에 추수한 식량이 다 떨어지는 이른 봄철이면 춘궁기(春窮期), 즉 '보릿고개'라 하여 보리 수확기까지 양식이 떨어지는 농가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쌀이 풍족하고 식생활이 서구화됨에 따라 보리 소비는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그러나 보리의 효능이 재조명되면서 보리를 이용한 가공식품 개발이 활발하다. 보리는 쌀에 비해 소화가 잘 되는데, 쌀밥 50g을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90분인데, 보리밥은 같은 시간에 100g을 소화한다. 국제영양학회에 의하면 쌀과 보리를 7:3 비율로 섞어 먹는 것이 몸에 제일 좋다고 한다.
보리의 주요 성분은 탄수화물 75%, 단백질 10%, 지방 0.5% 정도이며, 그 외 섬유질, 회분, 비타민, 무기질 등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보리는 다른 곡물에 비해 섬유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배변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