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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Apr 03. 2023

양산 가는 길

삶의 단상


지난 수요일 12시 20분 막 점심을 먹으려는데 작은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다른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


“점심 먹었니?”


뜬금없는 물음에 갑자기 나는 긴장을 한다. 언니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 전화를 하지 않는 성격이다.


“아직, 언니는 먹었어?”


“나는 먹었지, 그런데 웬일로 여태 점심을 안 먹었어?”


설마 언니가 이런 시시한 일로 전화를 할 리 없다. 불안감을 떨치며 나는 용기를 내 묻는다.


“왜? 무슨 일 있어?”


언니는 한숨부터 내쉬더니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영란이가 오늘 죽었단다.”


갑자기 하늘이 빙그르르 도는 충격을 억누르고 솟구치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아니, 왜? 좋아져서 퇴원하고 집에 와 있다며?”


“나도. 잘 몰라.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나저나 언니 때문에 큰일이다. 언니가 울음을 참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더라. 가보지도 못하고 어쩐다냐?”


“그러게.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는 잠자코 컴퓨터 화면만 노려보다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보았다.

영란이가 죽었단다.



영란이는 큰 언니의 큰 딸로 나이가 엇비슷한 나와는 조카이기에 앞서 친구 같은 그런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웃음이 많아, 작은언니는 그 애의 맑은 웃음을 보고 늘 말했었다.


“쟤는 까르르 웃는 모습이 꼭 꽈리를 부는 것 같아,”


아! 봄볕은 저리도 따뜻한데

이 좋은 봄날 우리 영란이가 떠났구나.


영란이는 결혼 후 줄곧 양산에 살고 있다. 올해 여든넷 인 큰 언니의 5남매 중 첫째인 아이

큰 언니가 용인에 살고 있고 나머지 조카들은 모두 잠실과 분당에 사는지라 가끔 만날 때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먼 곳에 사는 그 애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만나기 힘들었다.


일찍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두었고, 딸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으로 현재 드라마 작가로, 아들은 교정 공무원으로 일찍 자리를 잡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작년 아버지 기일에 큰언니가 영란이가 골수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중인데 크리스마스 무렵 골수이식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하여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직 검사 결과 형제 중 다행히 남동생의 조직과 일치해 수술을 앞두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언니를 보고 왜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나무라는 우리에게 큰언니는 웃으며 말했었다.


“너희들 알아봤자 속만 상할까 봐 그랬지.”


울 큰언니는 늘 그렇게 속이 깊은 분이셨다. 작년 12월 22일 골수이식 수술을 하였고 수술 경과가 안 좋아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에 마음 졸였지만 우리는 그 아이가 입원해 있는 부산까지 가볼 수가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내려왔다는 소식과 함께 지난달 집으로 퇴원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영란이가 다 나은 줄 알고 안심을 했던 터였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큰언니와 통화를 한다. 언니는 울음을 감추고 침착하게 말한다.


“어쩌겠니, 슬퍼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건강이나 신경 쓰렴.”


큰딸을 잃은 언니의 심정과 내 슬픔에 참았던 눈물을 훔치고 봄볕 밝은 밖으로 나갔다. 알뜰장에서 아무 일 없는 듯 앵초 화분 세 개를 사 화분에 옮겨 심고 베란다에 두었다. 은은한 앵초 향기는 영란이의 미소가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직장 때문에 목요일 오후 8시에 장례식장이 있는 양산에 가기로 했다.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로 뒤숭숭하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화장을 제때 하지 못해 발인 날짜가 일요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오전 7시 작은언니와 남동생 나는 영란이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양산은 두 번째 가는 길이다.

한 번은 1980년 봄 조카의 결혼식 때였고, 두 번째가 어제 조카의 장례 때문이었다. 간밤에 한숨을 자지 못했다. 일기예보 때문이었다. 간밤에 서울에 눈이 올 것이며 우리가 지나가야 할 중부지방과 충청지방에도 눈 소식 때문이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창밖을 보았더니 다행히 비가 조금씩 내렸다.

차는 곧 서해안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내비게이션에서 예상한 양산까지는 대략 4시간, 가는 도중 휴게실에 들려 잠깐 쉰다고 가정하였을 때 특별한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12시 무렵 조카가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고속도로에 차가 거의 없다. 지금까지 고속도로의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주말이 아닌가. 코로나의 위력을 다시금 느낀다.

우리는 영란이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그 아이의 길지 않은 삶을 슬퍼했다. 화성을 지나갈 때쯤 눈이 내린다. 고속도로 주변의 나무들이 눈옷을 입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운무에 쌓인 산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살아있는 이모는 그 모습을 담기 위해 핸드폰을 쉬지 않고 누른다. 뒷좌석에서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언니와 동생은 말한다. 그 사진이 제대로 나오기나 하겠냐고,

아무도 아침을 먹겠다는 사람이 없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옥천 휴게소에서 주유하고, 음료로 식사를 대신한다. 다시 달리는 길, 너무나 한산한 고속도로를 보며 매일 이렇다면 운전을 그만둔 지 한참 된 언니조차 차를 사서 여행을 다니겠다고 한다. 청도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도시들을 지나친다. 평생 처음 낙동강도 만나고, 밀양, 언양을 통과한다.


“아유 가슴 떨려.”


양산이 가까워지자 언니가 말했다. 나 역시 호흡이 빨라지며 긴장이 된다. 어떻게 조카를 맞이하며 조카의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근데, 우리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해야 해?”


남동생이 묻는다.


“그냥 다른 사람들 하는 것처럼 하면 되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영란이 영정을 보고 절을 하는 거냐고?”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하는 걸까? 조카의 영정을 보고 이모와 삼촌들이 절을 하는 게 맞는 걸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가서 보고 상황에 따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양산 시내에 접어들어 장례식장을 묻기 위해서 전화를 하였고, 둘째 조카가 곧 문자로 주소를 보내준다고 하였다.


"뜰안채"


동생이 내비게이션에서 주소 검색을 하지만 검색이 되지 않는다. 다시 둘째 조카에게 전화하니 장례식장이 아니라 집 주소란다. 이유를 물으니 장례식장 사용일이 3일이라 목요일 입관 후 망인은 장례식장에 안치하고, 일요일 오전 7시에 발인할 예정이란다. 양산에서 화장하지 못하고 경남 사천까지 가야 한단다.


우리는 모두 아연했다. 그럼 망자도 못 보고 생전에 살던 집에 간다고…. 잠시 모두 말이 없었다.


“잘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요일 밤에 올걸.”


언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조카의 집은 처음 방문한다.

조카의 아파트 입구에 핀 동백꽃

조카가 살았을 때, 우리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었다.


“이모, 삼촌,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요. 서울도 좋지만, 양산도 좋은 데 정말 많아요.”


우리는 그때마다 그렇게 하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살았을 때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집을 조카가 없는 지금 방문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주차장 앞에서 우리는 망설였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15층 조카가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조카의 집에는 영란이의 남편과 딸 내외와 아들 그리고 간호사인 막내 조카와 남편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잠시 어색한 인사가 오가고, 언니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집안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조카의 흔적들. 커다란 가족사진 옆으로 조카의 환한 모습이 액자에 담겨 우리를 맞는다.


조카의 나직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모, 삼촌, 그렇게 내가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해도 안 오시더니 이제야 오셨네요.”


정갈한 집안이었다. 베란다에 화초가 가득하다.

영란이 남편과 나는 나이가 같다. 남동생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던 터라 어색한 기운은 곧 사라졌다. 사인은 이식 후유증 때문이었다. 조카 남편은 이식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모든 것은 끝이 났고, 그 사람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을. 내일 발인까지 보고 갈 거냐는 물음에 오늘 가야 한다고 하자, 영란이 남편이 말한다.


“그럼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우리 집사람 장지나 보고 가시죠. 여기서 멀지 않아요. 삼촌 차 그냥 두고 제 차로 가시죠.”


조카 남편의 차에 올라 장지로 향한다. 조카의 장지! 우리가 바로 올라오기로 한 것은 조카의 그런 모습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차는 도심을 벗어나 곧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도가 가파른 묘지는 울긋불긋한 조화들로 어지러웠다.


커다란 벚나무 앞에서 차는 멎었고 조금 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 편편한 곳이 나타났다. 거기 조카가 묻힐 자리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봉분 없이 대리석이 놓인 그곳에 서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뻥 뚫리는 듯 머리가 맑아졌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멋진 풍경이며, 그곳이 종일 볕이 드는 따뜻한 곳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참, 좋은 곳이었다. 조카사위는 우리에게 장지를 가보자고 한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조카 옆에 빈자리는 자신이 들어갈 자리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그가 조카를 참 많이 아끼고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갈 때와 달리 마음 조금 가벼워졌다. 조카들의 만류로 양산에 가지 못한 큰언니와 통화 후, 우리는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명확히 해놓고 사는 날까지 즐겁게 잘 살자고 서로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한다.


도로는 한산하다 못해 차가 너무 없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 이 글은 2022년 3월 20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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