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재촉하는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며칠 전부터 가급적 컴퓨터와 거리를 두는 시간을 갖기로 작정을 한 터라 잠자리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맞는다. 에어컨 실외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아 어제보다 더 시원해진 서늘함은 저온으로 켜 둔 돌침대 온기도 모자라 발치에 있던 이불을 끌어와 덮게 만든다.
이렇게 가을이 오는구나!
이 가을이 나는 조금 버겁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이 산더미처럼 많기 때문이다.
십여 년동안 방치해 두었던 글과 사진, 문서들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뒤처진 컴퓨터에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데스크 탑 컴퓨터는 모두 버렸지만, 손때가 묻은 노트북은 차마 버릴 수 없어 보관 중인 두 대의 노트북을 꺼내보었다.
286 컴퓨터부터 시작하여 워드프로세서를 거쳐 데스크톱을 거쳐 그렇게 갖고 싶었던 노트북을 처음 구입했을 때의 기쁨.
그 첫 번째 노트북이 바로 삼성 센스 640이다. 20년도 넘은 그 컴퓨터에 오래전에 써둔 미발표 작품들이 꽤 남아있다. 먼지를 털어내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고물이 된 노트북 전원을 켠다. 컴퓨터 화면은 스크래치가 나있다.
픽픽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켜진다. 거의 15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내 첫 노트북.
원고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인터넷과 연결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찾고자 했던 원고가 노트북에 보이지 않는다. 적잖이 당황하며 저장된 파일을 검색해보지만 그 원고는 어디에도 없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 원고는 내가 처음으로 쓴 장편동화다.
글을 쓰지 않을 때에도
항상 그 원고는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어떻게 개작을 하여 그 작품을 다시 세상에 내놓을까
한가해질 때마다 문득문득 내게 화두가 되곤 하던 그 작품....
그러다 오래전에 쓸모가 없다고 다 버렸던 플로피 디스켓이 생각났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다 버렸는데 혹시 그 원고 디스켓이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서랍을 뒤진다.
오~ 다행히 그곳에 그 디스켓이 남아있다.
기쁜 마음으로 노트북에 디스켓을 넣어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팅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부팅이 되지 않는다.
몇 번을 시도하다 잘 아는 컴퓨터 사장님께 긴박하게 물었다.
센스 640 노트북을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지, 그리고 디스켓에 있는 문서를 읽을 방법과 usb로 옮길 수 있는지.
둘 다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는다.
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 장편동화를 쓰면서 상상했었던 즐거운 꿈들이 모두 사라졌다. 시리즈로 연작을 염두에 두고 썼던 아기 사슴에 대한 이야기...
그 모두가 허망한 꿈이 되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프린트라도 해 놓아둘 걸...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