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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일 동안 붉게 피는 마음(1) – 천일홍 이야기

삶의 단상

by 가야

천일 동안 붉게 피는 마음 – 천일홍 이야기(1)

♣ 남미의 태양 아래서 태어난 붉은 구슬


천일홍, 그 작은 구슬 같은 꽃송이는
햇빛을 머금고 피어나, 바람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열정을 품고 있다.


그 꽃의 뿌리는 멀리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


과테말라, 파나마, 페루, 브라질…


붉은 대지와 뜨거운 태양, 그리고 강렬한 삶의 리듬이 이어지는 그 땅에서
천일홍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함께 숨 쉬며 자라왔다.

♣ 천일홍의 이름과 정체


천일홍의 학명은 Gomphrena globosa이며, 비름과(Amaranthaceae)에 속한다.


‘Gomphrena’는 그리스어로 ‘매듭’ 또는 ‘구슬처럼 둥글게 묶인 것’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꽃의 우리말 이름인 ‘천일홍(千日紅)’은
‘천일 동안 붉게 피는 꽃’, 다시 말해 오래도록 색이 바래지 않는 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꽃말 역시 아름답다.


“변치 않는 사랑, 영원한 마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 남미 사람들의 천일홍 전설


옛 페루의 한 고원 마을에는
늘 하늘만 바라보던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웃 마을의 청년을 사모했지만
전쟁과 역병으로 인해 사랑은 시작조차 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그녀는 매일 아침 언덕에 올라,
사랑했던 이가 걸어가던 길목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작은 붉은 꽃을 심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꽃은 매년 같은 시기에 피어나,
햇살 아래에서 천일 동안 붉은빛을 지켰다고 한다.


“변하지 않는 그 마음이 천일 동안 피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꽃을
‘천일 동안 붉게 피는 마음’이라 불렀다.

♣ 천일홍, 내 작은 정원에서


나도 언젠가부터 이 꽃을 심기 시작했다.


가장 햇살 좋은 화단 끝자락,
에어컨 실외기 위의 작은 공간,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그 자리가
천일홍에겐 오히려 제 집처럼 잘 어울렸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무서울 정도로 오래 피는 꽃.
꽃잎은 바스러지지 않고, 말려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천일홍을 “드라이플라워의 여왕”이라 부른다.


작년에는 113호 언니와 함께 심었고,
그 씨앗은 언니가 젊은 시절 홍은동에서부터 이어온 것이라 했다.


그 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시고,
그 씨앗으로 자란 천일홍은 화단 한편에서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다.


말라가는 가지 끝에서도,
나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 천일홍,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천일홍은 햇빛을 매우 좋아한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직사광선이 드는 장소라면 가장 이상적이다.


햇빛이 부족하면 꽃송이가 작아지거나 색이 탁해질 수 있다.


물을 줄 때는 겉흙이 충분히 마른 뒤에 흠뻑 주는 것이 좋다.


다소 건조한 환경을 좋아하기 때문에,
습기가 많거나 과습 한 상태에서는 뿌리가 썩기 쉽다.


토양은 배수가 잘 되는 흙이 좋다.


일반적인 배양토에 마사토를 섞어 쓰면
통기성과 배수성이 개선되어 천일홍이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


꽃이 오래 피는 만큼, 시든 꽃을 바로바로 제거해 주면
계속해서 새로운 꽃송이를 올리려는 생리 작용이 활발해진다.


가을이 되면 꽃이 지고 씨앗이 맺힌다.


마른 꽃대에서 씨를 받아 종이봉투에 넣어 서늘한 곳에 보관했다가
다음 해 봄, 4~5월쯤 다시 파종할 수 있다.


천일홍은 비록 한해살이지만
그 씨앗을 정성껏 거두고 다시 심으면,
매해 여름마다 영원의 붉은 마음을 다시 피워낼 수 있다.

♣ 천일홍을 바라보며


천일 동안 붉게 피지 않아도 좋다.


잠시 피어도 그 빛이 진실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햇살이 지나간 자리,
꽃 한 송이가 말라가고 있다.


나는 그 꽃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씨앗을 손에 쥔다.


언젠가 또 피워내기 위해.
영원을 믿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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