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수 있는 대로 컴퓨터와 휴대전화 사용을 줄이세요. 시력이 더 나빠질 수 있어요. 지금도 아주 안 좋아요."
의사는 이런 시력으로 안경을 쓰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는 게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의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잘 알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심각할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다 사물을 보면 흐릿하게 사물의 초점이 흐려 사물을 파악하는 게 힘들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은 형체만 알아볼 뿐 가까이 와야 누군가를 식별할 수 있었다. 113호 언니가 심각한 시력 저하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는 시력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가급적 컴퓨터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가 갑자기 그 일을 그만두자 시간이 어마어마한 길이로 늘어났다. 오래도록 잊어버렸던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에어컨 실외기 위 꽃과 이야기도 더 길게 나눌 수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은 삶이 여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색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사색이라고 해봤다 특별하지 않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렇게 가는 것처럼 생각은 바람처럼 조용히 일어 어느새 사라지고 또 다른 바람처럼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사라졌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그만둔 숲 속 산책도 다시 시작했다.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신을 거듭하는 숲길은 언제 걸어도 신선하다.
이 산은 낮은 야산에 가깝다. 오래전 나는 이 낮은 야산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다. 아직 객기가 남아있을 때였을 것이다. 지금은 이 산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사실을 직시한 것인지 아니면 내 감각이 무디어진 것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phytoncide) 산을 걷는 일이 편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직 완전히 잠재워지지 않은 본능은 인왕산이 그리워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때도 있지만 이제 그런 바람을 잠재우는 데도 익숙하다.
슬리퍼 대신 운동화를 신고 우산까지 든 내가 숲으로 들어섰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조금씩 내리다 멎기를 거듭한다. 숲길 초입 왼쪽은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숲이다. 이 나무를 대하면 피톤치드(phytoncide)가 생각나 건강해진다는 기대에 부푼다. 이 메타세쿼이아 숲은 능골산 아래 위치한 푸르지오 아파트가 신축되면서 조성한 숲이었다.
아파트보다 더 빠른 성장으로 이제 나무는 한 아름도 넘는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테크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시멘트 길을 조금 더 올라가 야자 매트가 깔린 흙길을 걸을 것인가?
조금 망설이다 흙길을 택한다. 비 때문인지 숲은 고요하고 한가하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나는 흠뻑 빠져든다.
빗방울 소리마저 정겹다.
이따금 거센 빗방울이 상수리나무 잎에 요란스럽게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동영상 속에 담고자 하나 핸드폰을 켜기 무섭게 거센 빗소리는 이미 사라진 뒤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
때때로 찰나의 순간이 주는 깨달음의 지속을 위해 참선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무릎을 혹사시킨 일이 많았다. 그러나 깨달음의 순간은 아주 짧고 강렬했지만 지속할 수는 없었다. 숲은 늘 변화한다. 비단 숲뿐이 아니다 모든 자연은 쉴 새 없이 변하고 있다.
타박타박 숲길을 걷는다. 싸리나무 꽃을 보고 싶었는데 저만치 싸리나무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다가가 보지만 아직 싸리꽃은 피지 않았다. 싸리꽃을 보려면 서너 번은 이 숲 속을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다.
언제 심었는지 능골정 정자 옆 숲길 양쪽은 꽤 우람한 벚꽃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벚꽃을 보려 올봄 안양천을 일부러 찾아 고생했던 일이 떠오른다.
내년에는 벚꽃을 보려 굳이 안양천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숲 끝자락에는 매화나무도 많이 있다.
산 능선이를 지나 베트남식 건물 같은 정자 앞에 이르렀다. 전에는 이 정자 앞에서 보면 산 아래가 다 내려다보였는데 울창하게 자란 나무로 정자는 고립되어 있다. 오늘 내 산책길 최종 목표 지는 이 산 끝자락에 있는 고인돌이 있는 곳까지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고인돌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철쭉 군락지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고인돌이 있는 곳에 가려면 가파른 나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잠시 망설이다 내려가기를 포기한다. 아무래도 경사진 계단을 오르내린다면 내 무릎은 참았던 분노를 표출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큰길로 내려가 고인돌에 다가간다.
고척동 고인돌
고척동 고인돌은 오류중학교 뒤편 고척동 산 12-1번지에 있는 고척동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크기는 190 ×105 ×28(cm)이다. 능골산 초입에 있는 고척동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로 굄돌과 덮개돌이 분리되어 원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1998년 서울대 조사단이 처음 무덤 방틀을 확인하고 일부 유물들을 출토하였지만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2003년 재발견했을 때는 무덤방은 훼손이 되고 덮개돌이 옮겨진 뒤였다. 이런 이유로 고인돌로 추정했지만, 정밀한 조사를 한 결과 고인돌로 밝혀져 2004년 고인돌 안내판과 보호시설을 설치하고 구로구의 문화유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계급 문화와 함께 만들어진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