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 여름의 가장 고운 인내 –
햇살이 가득한 오후,
나는 오래된 정원길을 따라 걷다가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듯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를 마주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여름 속의 불꽃 같았습니다. 시들지 않고, 피고 또 피는 꽃잎들.
그 나무 아래서 문득, 나는 배롱나무를 간지럼 태워보았다는 옛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해봤습니다.
손끝으로 나무의 매끈한 줄기를 살며시 간지르듯 문지르자—
정말로 가지가 살랑, 살랑, 흔들렸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었기에 착각일지도 모른다며 웃어넘겼지만,
그 순간은 분명, 나무가 반응한 듯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배롱나무는 예부터 ‘간지럼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려왔습니다.
껍질이 매끈하게 벗겨지고, 그 자리에 햇살을 머금은 살결처럼 부드러운 나무살이 드러나는 이 나무는
손을 대면 웃듯이 흔들리고, 눈을 대면 여름을 속삭이듯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이 나무에는 오랜 세월을 품은 두 개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옛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던 이무기와 싸우다 용맹한 장사가 죽자, 그가 죽은 자리에
불꽃 같은 붉은 꽃을 피운 나무가 자라났습니다.
그 나무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백일 동안 피고 또 피며,
사람들은 그 용맹한 장사를 기억하기 위해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 불렀지요.
어릴 적 어머니를 잃은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 마당의 꽃이 피면 그 향기를 따라 어머니의 숨결을 떠올렸고,
“이 꽃은 백일이나 피어 어머니를 오래 기억하게 해준다네.”
그 말처럼, 이 꽃은 수십 날 동안 그리움처럼 지지 않고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찰과 고택의 마당마다, 그 나무는 조용히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성 작은 키의 나무로,
학명은 Lagerstroemia indica, 영어로는 Crape Myrtle(크레이프 머틀)이라 불립니다.
중국 남부와 인도,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 무렵,
주로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꽃은 7월부터 9월까지, 무려 백일 가까이 계속해서 피고 지며,
색상은 분홍, 진홍, 연보라, 흰색 등 다양한 변주를 보여줍니다.
나무껍질은 매끄럽고 해마다 탈피하듯 벗겨지는데,
그 모습 때문에 ‘간지럼나무’라는 귀여운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햇볕을 좋아하고 더위에 강한 성질 덕분에,
예부터 정원수, 사찰 조경수, 가로수로 널리 심어졌으며,
특히 오래된 고택 마당이나 절 앞에 우뚝 선 배롱나무는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화처럼 여름을 아름답게 수놓습니다.
인내
변치 않는 사랑
부드러운 마음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미소 짓듯 피어나 있는 이 꽃은
“참는 사랑”, “기다리는 마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햇살이 거세고, 바람이 매서운 계절에도
부드럽게 피어나 세상을 물들이는 그 인내의 빛을.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왜 이 나무는 백일 동안이나 지지 않고 꽃을 피우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의 그리움을 대신 품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잊혀질까 두려운 기억 하나, 떠나보낸 이름 하나, 되돌아오지 않을 계절 하나.
그리고 지금, 그 나무 앞에서 간지럼을 태우는 나를 보며
배롱나무는 여전히 조용히 고개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흔들림은 웃음일까요, 아니면 기억의 떨림일까요.
https://youtu.be/mgiXTOj_bFU?si=zZGvJlFbG96F2WA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