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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세 마리를 품은, 햇빛을 사랑하는 회양목

회양목 이야기

by 가야

올빼미 세 마리를 품은, 햇빛을 사랑하는 회양목

우리 화단을 둥글게 감싸고 선 회양목은 사계절 내내 변치 않는 초록으로 집을 지켜왔다. 이른 봄, 아직 바람 끝이 차가운 계절이면 가장 먼저 은근한 꿀 향을 품은 작은 노란 꽃을 피운다. 가까이 다가서야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향, 그 속에서 겨우내 얼어 있던 마음이 천천히 풀려난다.

가을이 오면 회양목은 또 하나의 놀라움을 선사한다. 가지 끝마다 세 개의 씨방이 꼭 붙어 둥근 열매가 맺히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올빼미 3형제’라 부른다. 까만 씨앗을 품고 나란히 앉은 열매가 마치 세 마리 올빼미가 가지 위에서 밤을 지키는 듯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열매가 세 갈래로 갈라지며 까만 씨앗이 톡 하고 튀어나오는 순간은 작은 폭죽처럼 경쾌해, 보는 이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열매가 진 자리에서 이미 꽃눈이 맺혀, 추운 겨울을 그대로 견디며 다음 봄을 준비한다는 사실이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작고 여린 꽃눈 안에는 새 계절이 자라나고 있다.

회양목은 성장 속도가 느리지만 사계절 푸른 잎을 간직한다. 그래서 ‘인내’, ‘꾸준함’,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녔다. 서양에서는 이 변치 않는 초록빛을 영원의 상징으로 여겨 사랑과 우정이 오래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심기도 했다. 화려한 꽃을 주인공으로 삼는 예술에서 회양목은 다소 조용했지만, 정원과 공예의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 회양목은 우리 땅에서도 오랫동안 함께해 온 나무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동부 일부 지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남부와 제주에도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알고 나니 집 둘레를 단정히 감싸고 선 그 초록빛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베르사유 궁전의 파르테르 정원에서는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는 핵심 식재로 쓰였고, 영국의 매너 하우스 가든에서는 미로와 토피어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구, 원뿔, 동물의 형상으로 다듬어진 초록의 조각들은 정원을 거니는 이들에게 동화 같은 풍경을 선사했다.


목재는 결이 곱고 치밀하여 체스 말이나 악기 부품, 섬세한 조각품으로도 쓰였으며, 동아시아에서도 작은 불상과 인장, 차도구 손잡이에까지 활용되었다. 세밀한 조각에도 갈라짐이 거의 없다는 특성이 장인의 손끝에서 오랜 세월 사랑받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 단단하고 고요한 나무가 지닌 강인함에도 약한 지점이 있다. 햇빛을 사랑하는 회양목은 그늘 속에서는 자라지 못할 뿐더러 오래 살 수도 없다. 몇 해 전, 메꽃이 회양목 줄기를 감고 올라가 그 위에 연분홍 꽃을 피웠을 때, 그 모습이 기특하고 아름다워 그대로 두었다.


잠시 빌려준 자리일 뿐, 회양목이야 묵묵히 견디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자 회양목의 잎은 서서히 빛을 잃더니 마침내 하얗게 말라버렸다. 햇살을 가로막은 메꽃의 그림자가, 그 단단하던 초록을 앗아간 것이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회양목의 생명은 그늘을 허락하지 않는 빛 속에서만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잠깐의 화려함을 오래 보고 싶다는 욕심이, 그 꾸준하고 단단한 초록을 해쳤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면 때로는 다른 아름다움을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마음 깊이 새겼다.

지금도 화단을 지날 때면 그 자리를 바라본다. 메꽃의 덩굴이 드리웠던 자리에 새로 심은 어린 회양목이 다시 햇살을 향해 똑바로 자라고 있다. 봄의 꽃, 가을의 올빼미 열매, 겨울을 이겨내는 꽃눈—계절을 견디며 자신을 잃지 않는 그 초록빛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되뇐다.


오래 지켜내야 할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햇빛을 향해 묵묵히 뻗어나가는 힘이라는 것을. 인내와 꾸준함,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 그것이 회양목이 사계절 내내 세상에 들려주는 오래된 이야기이자, 내게 남긴 가장 깊은 교훈이다.


https://youtu.be/VYJxnHmPy7E?si=9x0hYixJMReNWg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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