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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능소화랍니다.

오늘의 탄생화

by 가야

내 이름은 능소화랍니다


내 이름은 능소화,

8월 6일 탄생화이지요.


한때는 궁궐 담장을 물들이던 꽃이었지요.


화려하지도 않고, 향기롭지도 않지만
내게는 하늘을 우러르는 붉은 기개가 있었답니다.

나는 담을 타는 꽃입니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
높은 곳에 닿고 싶었어요.


마치 사무치도록 그리운 이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처럼요.

조선의 어느 여름날,
나를 정성껏 가꾸던 이가 있었지요.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조용히 담장을 바라보던 궁녀 하나.


그녀는 나를 부르며 속삭였습니다.


“이 꽃은 내 마음과 닮았어.
닿지 못해도 자꾸만,
자꾸만… 그 사람을 향해 올라가니까.”

그때 나는 귀한 꽃이었어요.


궁궐 담장을 물들이고,
선비의 시 한 수에 오르고,


상류 양반가의 정원 한켠에 심어져

귀한 대접을 받았지요.


하지만 요즘은…


나는 골목길 허름한 담벼락에 피어납니다.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가는 발길 아래,
길고양이들의 놀이터가 된 내 줄기를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꽃은 너무 흔해서 재미없어.”
“담쟁이처럼 아무 데서나 올라가는 꽃이잖아.”


그럴 때면 마음이 조금 아려옵니다.


나는 한 번도 ‘흔해지고 싶다’고 한 적 없어요.


그저… 햇살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담 너머를 넘고, 골목길에 닿은 것뿐인데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오늘도 나만의 방식으로 핍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조용히, 담장을 타고 오릅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그리움이라면, 기다림이라면,
나는 지금도 제 몫을 다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세상에 가장 애틋한 사랑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자라는 마음일지도 몰라요.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진 꽃이랍니다.

그러니, 혹시 어느 여름날
작은 골목길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 너였구나.
그 오랜 기다림을 품은 꽃…”


하고 한 번쯤 불러 주세요.


그러면 나는 기꺼이
그 붉은 꽃잎으로
당신 마음속 담장을 살며시 넘어가 드릴게요.


참, 내 소개를 깜빡했네요.


나는 능소화, 학명은 Campsis grandiflora예요.
영어로는 Chinese trumpet vine, ‘중국의 나팔꽃’이라 불리죠.


중국이 내 고향이고, 우리나라에는 오래전부터 담장을 수놓아 왔어요.


나는 여름, 6월에서 8월 사이 붉은 꽃을 피우며,
햇살을 좋아하고 담을 타고 오르며 자라요.


내 줄기는 덩굴처럼 감기고,
꽃은 나팔처럼 벌어지지요.


높은 곳을 향해 오르기에, 내 이름 ‘凌霄(능소)’는
‘하늘을 넘는다’는 뜻도 담고 있답니다.


나는 화려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조용히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깊은 꽃이에요.


혹시 당신 마음에도 그런 그리움 하나쯤 피어나 있다면—
그건 어쩌면 나, 능소화일지도 몰라요.


https://youtu.be/4gvGl4k9W-Q?si=R2JjOy0J35yogb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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