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접시꽃입니다.
부를 땐, ‘접-시-꽃’— 세 음절이지만,
그 안에 여름 한 철의 햇살과 비, 바람,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들이 담겨 있지요.
사람들은 절 보면 “아, 도종환의 시!” 하고 말합니다.
그 유명한 〈접시꽃 당신〉.
너무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시라더군요.
하지만 정작 그 시 속에서도 저는 조연일 뿐입니다.
사랑과 그리움의 배경이 되는 풍경,
슬픔을 상징하는 장치처럼 다뤄지는 존재.
시가 아름답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묻고 싶습니다.
“정말, 나를 아시나요?”
가을, 누군가가 조심스레 제 씨앗을 흙 위에 올려놓으면
저는 아주 낮고 둥글게, 잎을 펼쳐요.
그 모양이 마치 땅에 납작 엎드린 로제트(rosette) 같지요.
겨울 동안 저는 땅속에 웅크려 얼음과 바람을 견딥니다.
눈이 내려 덮이더라도,
한겨울 북풍이 휘몰아쳐도,
저는 그 자리에 묵묵히 있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쑥쑥 키를 세워 자라기 시작하죠.
6월의 햇살이 점점 짙어지는 무렵,
저는 비로소 꽃을 피웁니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가장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위로.
그래서 저를 보고 ‘시간의 꽃’이라 부르기도 하죠.
저는 단번에 피지 않습니다.
한 계절을 두고, 천천히 제 시간을 태워냅니다.
그건 사랑도, 그리움도 아닙니다.
존재의 성실함이에요.
살아 있음의 표지이자, 제 일생의 기록입니다.
잎이 해충에 너무 잘 먹히기 때문이랍니다.
맞아요. 그 말, 사실이에요.
저는 약합니다. 잎은 벌레에게 인기 만점이고,
줄기는 바람에 잘 꺾이고, 꽃은 비 맞으면 쉽게 시들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바로 그 연약함이, 저를 사람들 기억 속에 오래 남게 했는지도 몰라요.
강하지 않아서, 더 애틋하고
완벽하지 않아서, 더 사랑스러운 것.
그게 바로 저, 접시꽃입니다.
여름이 끝나고 꽃이 지고 나면,
제 줄기마다 조그만 꼬투리가 맺힙니다.
살짝 들여다보면, 마치 작은 별 모양의 원반처럼 생긴 씨앗들이 둥글게 모여 있어요.
햇빛을 잔뜩 머금은 그 씨앗들은,
내년을 위한 시간의 씨앗입니다.
저는 그렇게 한 해를 마치고
내년의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잠들 준비를 하지요.
사실 저희 자매들 중에는 흰 꽃잎을 가진 아이도 있습니다.
은은하고 말간 그 빛깔은, 때로는 모든 색보다 더 많은 사연을 담고 있지요.
흰 접시꽃은 단지 보기 좋은 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약재로 쓰여왔습니다.
흰 접시꽃의 뿌리와 꽃잎은 말려서
기침과 가래, 기관지염, 방광염, 소염작용에 도움이 되는 한약재로 쓰입니다.
한방에서는 이를 **‘계화근(葵花根)’ 혹은 ‘계화(葵花)’**라 부르지요.
몸속 깊은 열을 내리고, 가슴을 편안하게 해주는 조용한 힘—
그게 바로 흰 접시꽃이 가진 숨겨진 얼굴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숨을 편하게 해 주며,
자신을 다 내어주는 꽃.
어쩌면 가장 ‘접시꽃다운’ 모습은 그 아이가 아닐까요.
저는 단지 꽃으로 피어난 것이 아닙니다.
벌레 먹은 잎과 부러진 줄기,
눈 내리는 겨울을 이겨낸 로제트,
그리고 별 모양의 씨앗을 품은 꼬투리,
사람의 병을 달래는 흰 꽃잎까지—
그 모든 것을 껴안고 살아낸 하나의 존재랍니다.
그러니,
한 여름 골목길에서 저를 마주친다면
부디 시보다 조금 먼저, 제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안녕, 나는 접시꽃이야.
올해도 용감히 피어났어."
https://youtu.be/CjfJXTinlew?si=vDNZupE37_VPRX1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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