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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깃유홍초의 디아스포라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새깃유홍초의 디아스포라 | 낯선 땅에서 피어난 붉은 별꽃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화단은 한때 찬란했던 봄과 여름의 색을 조금씩 거두어 들인다. 화사하던 장미는 열매를 품고, 백일홍은 바람에 지친 꽃잎을 하나둘 떨군다. 그 잠잠한 자리에서 불현듯 고개를 든 것은, 작고도 강인한 새깃유홍초(Quamoclit pennata)였다.


몇 해 전, 가벼운 호기심으로 심어 둔 몇 포기 모종이 해마다 스스로 씨앗을 떨어뜨려 자연발아를 이어간다. 사람의 손길 없이도 생명의 연속을 보여주는 이 기특한 식물은, 때마저 정확히 아는 듯 화려한 여름꽃들이 물러날 즈음 잎을 틔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을 햇살이 조금씩 부드러워질 때, 새의 깃털을 닮은 잎사귀와 가느다란 덩굴을 사방으로 펼치며 화단을 새롭게 채운다.

어느 해의 기억이 문득 스민다. 라일락 나무 줄기를 타고 오르던 새깃유홍초가 가지 끝까지 빽빽이 올라, 붉은 별꽃을 반짝이며 피워냈던 순간. 햇살에 반사된 그 불빛은 한여름 한복판에서 느낀 ‘8월의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한 계절이 다른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그 경계에서, 이 붉은 별들은 고요히 빛났다.


나는 종종 묻는다. ‘새깃’이라는 이름은 누가 처음 붙였을까. 공작의 꼬리처럼 고운 그 잎을 바라보며, 사람은 어떤 감흥을 언어로 붙잡았을까. 깃털 같은 잎의 미묘한 흔들림을 단어로 옮기는 일은, 마치 바람의 결을 문장으로 새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저 바라볼 뿐, 언어가 따라오지 못하는 순간—그 자체가 이미 시이며, 사색의 완성이다.

덩굴은 멈춤을 모른다. 부용의 줄기를, 클레마티스의 빈 가지를, 심지어 화분 속 고추줄기마저 힘차게 감아올라 하늘을 향한다. 다른 식물들을 잠시 숨 가쁘게 할 만큼 거침없는 기세다. 그러나 나는 그 얽힘을 굳이 풀지 않는다. 자연이 스스로 엮어내는 어울림의 질서를 인간의 손으로 끊고 싶지 않아서다. 어쩌면 생명이란 모두 이처럼 서로의 존재를 딛고 자라는 것일 테니.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고 했듯, 화단 역시 한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는다. 오늘 붉게 반짝이는 새깃유홍초도 내일이면 꽃을 떨어뜨리고, 또 다른 생을 준비하겠지. 그 순환을 지켜보는 나는, 매년 반복되지만 단 한 번뿐인 가을의 빛 속에서 삶의 무상함과 영속함을 동시에 본다.

이 붉은 별빛을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켠이 잔잔히 환해진다. 그 빛은 화려하지 않되 깊고, 작지만 멀리까지 닿는다. 마치 우리가 던지는 사색과 질문이 세월 속에서 스스로 씨앗을 떨어뜨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새깃유홍초의 원산지는 중남미. 학명은 Quamoclit pennata로, 라틴어의 ‘pennata’는 ‘깃털 모양의’라는 뜻이다. 꽃말은 ‘기쁨(Joy)’, ‘사랑의 인사(Heartfelt greeting / Love’s greeting)’, ‘정열(Passion)’.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무렵 원예용 씨앗이 처음 전해져 이후 정원과 화단에서 여름과 초가을을 장식하는 덩굴식물로 자리잡았다.

문득 상상을 해본다. 잉카의 후예들이 남긴 잊힌 별빛이 환생한 것은 아닐까. 저 먼 대륙에서 어쩌다 이 한국 땅까지 건너왔을까. 고향이 그리워 저토록 보이는 대로, 아니 닥치는 대로, 무조건 타고 올라가는 것은 아닐까. 인간만이 디아스포라를 겪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식물의 디아스포라가 아닐까—순풍에 씨앗을 싣고 낯선 땅에 뿌리내린 채, 여전히 고향의 별빛을 품은 채 살아가는 생의 모습.


그런데 이 꽃의 꽃말은 내 이런 상상을 단번에 부서뜨린다. 하기야 이 꽃말이야말로, 원산지의 뜨거운 태양 아래 자라는 유홍초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말이리라.


나 또한 아주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났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리움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긴 덩굴을 뻗는다. 새깃유홍초가 붉은 별꽃을 달고 하늘을 향해 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의 오래된 향수 또한 오늘 이 화단에서 조용히 꽃을 피운다.


https://youtu.be/-VCAUuKX4uQ?si=S6oVh_AjnBkMKq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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