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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의 추억-봉선화

10월 19일 탄생화

by 가야


나는 봉선화


울타리 곁 장독대 옆에서 해마다 붉게 피어나는 나, 봉선화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봉숭아라고 부르며 여름이 깊어가면 내 꽃잎을 모아 손톱에 물을 들이곤 했지요.


첫눈이 올 때까지 붉은 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그 설렘이 내 꽃잎을 더 붉게 물들게 했습니다.


첫사랑을 물들이던 그 여름밤


모깃불 연기 속에서 눈물과 콧물을 훔치며 꽃잎을 찧던 소녀들의 웃음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아주까리 잎으로 내 붉은 건더기를 감싸고 실로 친친 동여매던 그 손길,
밤새 뒤척이며 떨어질까봐 잠을 설친 아이들의 숨결.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발가스레한 손톱—그 빛 속에는
첫사랑을 꿈꾸던 그 시절의 바람이 오롯이 스며 있었습니다.

예술 속에서 다시 피어난 나


나는 사람들의 추억 속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김소월의 시 〈봉선화〉, 김동환의 시 〈봉선화〉에서
그리움과 기다림의 상징으로 노래되었고,


홍난파 작곡, 김형준 작사의 가곡 〈봉선화〉에서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멜로디로
한 시대의 슬픔과 민족의 아픔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고인이 된 현철 씨가 부른 노래
〈봉선화 연정〉에서 나는 또 한 번 사람들 곁으로 다가섰습니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로 시작하는 그 노랫말을 들을 때면
‘어쩌면 저렇게 나를 잘 표현했을까?’ 하고 나조차 감탄하지요.

톡—하고 터지는 생명의 순간


잘 익은 내 씨앗 꼬투리는 연한 녹색을 띠며 세로줄이 선명해집니다.


그때가 되면 손가락만 살짝 갖다 대도
마치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탁—’ 소리를 내며 터지고
씨앗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남은 꼬투리는 또르르 말려,
자신의 할 일을 다 마친 듯 여유롭게 뒷짐을 지지요.


오늘도 전하는 마음


순결, 인내, 그리고 오래된 약속.
이것이 나, 봉선화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마음입니다.


손끝에서 피어난 추억과, 시와 노래와 그림 속에 남은 그 기억이
오늘도 누군가의 가슴에 붉게 번지기를—
나는 여전히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9Fn3Cj2CGxw?si=-VwYOYvgY9aDvt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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