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글방
목 목동아파트 산책길에 만난 마로니에와 두 소녀산책길에 만난 마로니에와 두 소녀
비가 촉촉이 내리던 늦가을, 목동아파트의 중앙 산책로는 젖은 낙엽과 함께 반짝이는 열매들로 물들어 있었다.
스무 해 넘게 이곳에 살고 있는 한 거주자는 처음 이사 왔던 날을 떠올린다.
“가로수에 밤이 열렸나?”
윤기 나는 갈색 열매가 밤처럼 보여 깜짝 놀라 가까이 들여다보니,
껍질은 매끈하고 속에는 반짝이는 씨앗이 하나.
알고 보니 그것은 밤이 아닌 마로니에(유럽칠엽수, Aesculus hippocastanum)의 열매였다.
‘마로니에’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을 먼저 떠올린다.
20세기 중반부터 서울 도심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곳의 나무가 바로 유럽마로니에다.
초여름이면 하얀 원추꽃이 화사하게 피고, 가을이면 밤을 닮은 열매가 떨어진다.
목동아파트 단지는 규모가 크고 녹지가 넓어, 마로니에와 함께 우리나라 토종 칠엽수(Aesculus turbinata)도 함께 자란다.
토종 칠엽수는 울릉도와 강원·경북의 산간 계곡에서 자생하며,
열매 껍질에 가시가 비교적 촘촘하고 7장이 뚜렷한 손바닥 모양의 잎을 지닌다.
그래서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가시가 있는 열매와 매끈한 열매가 나란히 떨어진 풍경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그날 산책길에서 두 초등학생 소녀가 학원에서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 열매가 무슨 열매인지 아니?”
잠시 머뭇거리던 한 아이가 수줍게 대답했다.
“마카로니…?”
뜻밖의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비슷해! 하지만 이름은 ‘마로니에’야.”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집에도 이 열매 있어요.”
“먹어도 돼요?”
“아니, 먹으면 안 돼. 빨아도 안 돼요.”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집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이들이 던진 “먹어도 돼요?”라는 질문은 흔히 생기는 오해를 보여준다.
마로니에 열매에는 사포닌(saponin) 성분이 들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포닌’ 하면 먼저 인삼의 진세노사이드를 떠올린다.
인삼의 사포닌, 즉 진세노사이드는
면역력을 높이고 피로를 회복시키며 항산화 작용을 돕는 성분으로,
차나 건강보조식품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름이 같다고 해서
모든 사포닌이 인삼처럼 인체에 이로운 것은 아니다.
마로니에, 곧 칠엽수 열매에 들어 있는 사포닌은
에스신(aescin) 이라 불리며,
혈관을 강화하고 부종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어
추출·정제한 성분을 연고나 크림 같은 외용 의약품에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씨앗을 그대로 섭취할 경우
위장 장애, 구토, 신경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
식용은 금지된다.
즉, 사포닌은 화학 구조와 함량, 가공 방식에 따라 인체 반응이 크게 다르다.
인삼의 사포닌은 섭취해도 안전하고 이롭지만,
마로니에 열매 속 사포닌은 원물 그대로 먹으면 독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때 방송국 작가가 마로니에 이야기를 프로그램에서 들려 달라며 출연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장소만 알려 주었을 뿐, 그날 방송팀이 왔을 때는 열매가 이미 경비 아저씨들의 손에 쓸려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열매가 어쩌다 한두 개씩만 떨어지고,
아이들이 발로 부수거나 경비 아저씨들이 금세 치워버리니 그럴 만도 하다.
그때 문득 떠오른 노래가 있다.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지고 있겠지」.
노래 속 마로니에는 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상징이었듯,
목동의 마로니에도 세월과 사람의 이야기가 켜켜이 스며 있다.
목동아파트가 언젠가 재건축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오늘 ‘마카로니’라고 열매를 부르며 웃던 그 소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이 나무들을 어떤 추억으로 기억하게 될까.
비 오는 가을날, 마로니에와 칠엽수가 나란히 서서
반짝이는 열매를 떨어뜨리던 이 순간이,
그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따뜻한 기억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알아두세요
사포닌은 이름은 같아도 모두 인삼처럼 몸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인삼의 진세노사이드는 건강식품으로 안전히 섭취할 수 있지만,
마로니에·칠엽수 열매의 사포닌(에스신)은 식용 시 독성이 있으니
감상만 즐기고 절대 입으로 가져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https://youtu.be/YyvwHk3cgsw?si=82OuFxnTw-OFWs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