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루엘리아 이야기입니다.
몇 해 전 처음 이 꽃을 만났을 때의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눈에 마음을 빼앗은 건 깊고 차분한 보랏빛, 그리고 대나무를 닮은 곧은 잎이었습니다. 작은 삽목으로 시작한 인연이었는데, 해마다 왕성하게 자라 이제는 제 화단을 가득 채우는 군락이 되었습니다.
장마가 길어도, 가뭄이 이어져도 한 번도 투정하지 않는 성실한 식물, 그 단단한 생명력 앞에서 저는 종종 고개를 숙입니다. 겨울이 오면 실내로 들여 잠시 쉬게 하고, 봄 햇살이 부드러워질 즈음 다시 화단으로 옮기는 일은 이제 저와 루엘리아 사이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루엘리아(Ruellia simplex, syn. Ruellia brittoniana)의 고향은 멕시코와 카리브 해 연안, 그리고 브라질 북부의 열대 평야입니다. 이 식물의 속명은 16세기 프랑스의 약초학자 장 뤼엘(Jean Ruel)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하지요. 세기를 건너온 이름이 제 화단에서 다시 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면, 지구의 또 다른 시간과 풍경이 제 마음 속으로 밀려오는 듯합니다.
루엘리아를 둘러싼 고전적 신화는 없지만, 멕시코와 카리브 해 지역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꽃과 함께 살아오며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왔습니다.
유카탄과 쿠바의 원로 가드너들은 이 보랏빛 꽃을 “새벽의 여신이 남긴 발자취(Huella de la Diosa del Alba)”라고 불러 왔습니다. 이른 아침 햇살 아래 가장 짙게 빛나다가 오후가 되면 서서히 색이 옅어지는 모습을 보며, 새벽의 신비가 잠시 머물다 간 흔적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푸에르토리코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농가에서는 “비를 부르는 꽃(Flor de la Lluvia)”이라는 이름이 전해집니다. 비가 오기 전날이면 꽃잎의 색이 더욱 깊어져, 이를 보고 곧 소나기가 내릴 것을 짐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멕시코 북동부 이주민들은 이 식물을 “이방인의 보라(Morada de los Forasteros)”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토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척박한 땅에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는 모습이, 새 터전을 찾아온 그들의 삶과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루엘리아가 가진 가장 매혹적인 비밀 중 하나는 바로 하루살이 꽃이라는 점입니다. 매일 아침 새 꽃이 피어나고, 해가 저물면 그날의 꽃은 고요히 지며, 이튿날 다시 새로운 꽃이 피어납니다. 비록 한 송이의 수명은 하루뿐이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꽃망울이 여름 내내 화단을 보랏빛으로 물들이지요.
루엘리아의 꽃말은 ‘끈기와 인내’입니다. 가뭄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변함없이 꽃을 피워내는 강인함에서 비롯된 의미입니다. 보라색 꽃잎이 전해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평온한 영혼’, ‘마음의 휴식’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집니다. 제 화단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그 보랏빛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제 마음도 고요히 가라앉습니다.
저만의 겨울나기 비밀도 하나 있습니다. 해마다 화단에서 한 해를 보낸 루엘리아는 늦가을이 되면 몸집이 놀랄 만큼 커집니다. 그런데 그 큰 덩치를 통째로 실내로 들여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저는 서리가 내리기 직전 가지를 모두 잘라 큰 화병에 물꽂이를 합니다. 놀랍게도 물속에서도 꽃은 계속 피고 지며, 머잖아 뿌리를 내립니다. 뿌리가 서로 얽혀 복잡해져도 봄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새봄이 오면 뿌리째 화단으로 옮겨 심습니다. 온실이나 대형 화분이 없어도 손쉽게 겨울을 날 수 있는, 경험에서 길러낸 소박한 지혜이지요.
바람이 스치면 은은하게 흔들리는 보랏빛 물결 속에서, 루엘리아는 오늘도 말없이 계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잠시 멈추어 그 빛을 바라보면, 새벽 여신이 남긴 발자취처럼 제 마음에도 고요하고 깊은 평화가 내려앉습니다.
대나무를 사랑한 나머지 한때는 수묵화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책장 위에서 붓과 화선지는 장식품이 되어버렸지요. 그럼에도 대나무를 향한 제 열정만큼은 여전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대나무를 닮은 이 꽃을 참 좋아합니다. 쭉쭉 뻗은 줄기와 강인한 마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쭈글쭈글한 보랏빛 꽃까지. 아마 루엘리아와 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절을 함께 거닐며 동행을 이어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https://youtu.be/WpH5mXpI-tE?si=dD0sFLqojOL-hBS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