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글방
나는 어릴 적부터 이 풀을 ‘명화나물’이라 불렀다. 어머니가 ‘명아주’라고 하셨는지, ‘명화나물’이라고 하셨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고, 한동안 그렇게 기억해 왔다.
어느 여름, 여주 신륵사에 어머니와 단둘이 갔을 때의 일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도로변 가득 명아주가 자라고 있었고,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시더니 치마폭에 우듬지를 한 움큼 꺾어 담으셨다. 절에 가는 일보다 길가의 나물이 더 소중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우습기도 하고 짜증도 났지만, 지금은 그때 활짝 웃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명아주는 어디서나 잘 자라는 한해살이풀이다. 빈터나 길가, 밭두렁에서 흔히 볼 수 있고, 6월 무렵이면 잎 사이로 작은 꽃들이 피어난다.
이름은 한자로 ‘藜(려)’라 쓰는데, 옛 중국 고전 『시경』에도 등장할 만큼 오래된 식물이다. 잎과 줄기에는 희끄무레한 분이 덮여 있고, 어린잎에는 붉은빛이 도는 돌기가 보여서 ‘붉은 중심을 가진 풀’, 학명으로는 Chenopodium album var. centrorubrum이라 불린다. 흰빛이 도는 변종 ‘흰명아주’도 있으나, 우리가 주로 나물로 먹는 것은 이 명아주다.
봄철 연한 순은 데쳐서 무쳐 먹는다. 된장국에 넣거나 지짐을 해도 좋다. 흉년이 들면 씨앗을 곡식에 섞어 허기를 달랐다고도 한다. 다만 명아주는 옥살산과 사포닌을 함유하므로 반드시 데쳐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쌉싸래한 맛이 부드럽게 변하며, 고소한 향과 질긴 생명력이 입안에 전해진다.
명아주는 단순히 나물로 끝나지 않는다. 곧게 자란 줄기는 지팡이로도 쓰였는데, 이를 ‘청려장(靑藜杖)’이라 불렀다. 청려장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장수와 효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도 매년 노인의 날이면 백세 어르신께 청려장을 드리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명아주는 이렇게 우리 민속과 상징 속에도 뿌리내린 풀이다.
나는 명아주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풀은 전 세계 어디서나 발견된다.
중국에서는 ‘藜’라 불리며, 가난한 백성들이 흉년을 견디던 풀로 『시경』에 기록되어 있다.
또 명아주 줄기 지팡이는 선비의 청빈을 상징하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바투아(bathua)’라 부르며 카레와 빵에 넣어 먹는다. ‘가난한 집에 명아주 한 포기만 있어도 굶지 않는다’는 속담까지 있다.
유럽에서는 ‘램스쿼터스(lamb’s quarters)’라 불리며, ‘가난한 자의 시금치’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먹어왔다. 북미 원주민은 씨앗을 곡물처럼 먹었고, 남미 안데스에서는 그 친척인 퀴노아가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에서도 명아주, 즉 아카자(アカザ)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본초서에는 식용 기록이 남아 있지만, 우리처럼 나물 문화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사방이 바다인 나라여서 해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대신 전후 극심한 식량난 시기에는 명아주 죽을 쑤어 먹으며 허기를 달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일본 드라마 속 가난한 시대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일제강점기에는 끼니를 잇기 어려웠지만, 평소에는 산과 들의 다양한 나물들이 백성들의 밥상을 지켜주었다. 명아주는 그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한 풀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명아주는 우리 곁의 잡초 같지만, 사실은 인류의 삶을 오래 지탱해 온 풀이다. 이름 하나에도 『시경』과 동아시아의 상징이 담겨 있고, 지팡이 하나에도 장수의 염원이 서려 있다. 인도인의 밥상과 유럽 농민의 수프 속에도, 북미 원주민의 곡물창고 속에도 명아주는 있었다.
오늘 화단에 돋아난 명아주를 보며 나는 어머니의 웃음을 떠올린다.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풀일지라도, 그 속에는 수천 년을 이어온 인류의 이야기가 켜켜이 겹쳐 있다.
귀했던 명아주 나물이 잡초 취급을 받는 지금, 나는 그 묘한 쓸쓸함을 안고 명아주 한 줌을 뜯어 무쳐보려 한다. 아마 한 입 머금으면, 어린 시절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다시금 내 안에 살아날 것이다.
참고 자료
『시경(詩經)』 : “誰謂荼苦, 其甘如薺” 구절, 들나물에 관한 고대 기록
『본초강목(本草綱目)』 : 명아주의 약용 기록
국립수목원 「국가표준식물목록」 : 명아주·흰명아주 명칭과 분류 정보
국립생물자원관 종 정보 : Chenopodium album의 생태와 분포
Plants of the World Online (Kew Gardens) : 명아주의 세계 분포와 변종 자료
일본 『本草和名』 및 산나물 문화 관련 자료 : 아카자(アカザ)의 식용 기록
인도·네팔 식문화 연구 논문 : bathua(바투아)의 식용과 영양
유럽 고고식물학 자료 : 철기시대~중세 유적에서 발견된 명아주 씨앗
https://youtu.be/k3nP3vp7V8I?si=trPkXwbSMmDYZG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