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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속에서 다시 만난 줄꽃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가을비 속에서 다시 만난 줄꽃


작년 이맘때였다. 서울식물원 숲문화학교에 참여했던 어느 아침, 보슬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강의실 문을 열자 놀라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강생은 나와 함께 간 지인, 그리고 나—단 둘.


“두 분만 오셔도 강의는 진행됩니다.” 강사 선생님의 단호한 목소리에,
어색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셋의 오붓한 숲 체험이 시작되었다.

비에 젖은 수목원을 천천히 거닐며, 연못 위에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고,
안개에 감싸인 나무들의 향기에 잠시 취해 있을 때였다.


강사 선생님이 어느 식물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노란 우비 속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로 말했다.

“이 꽃이 줄꽃이에요. 정말 예쁘지요?
이 꽃을 보는 순간, 너무 행복해서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답니다.”


그녀의 작은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위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자 우산 끝의 물방울이 핸드폰 위에 스며들며 반짝였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줄꽃은 이미 지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는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숲문화교실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줄꽃이 그렇게 예쁘다”던 그녀의 말이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언젠가 꼭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남았다.


푸른수목원을 찾아보았지만 줄꽃은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줄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도 잘 알지 못했다.


어제, 신트리공원 어린이 텃밭 앞 논에서 나는 마침내 그 꽃을 만났다.
아이들이 호랑나비를 잡느라 부산하게 뛰어다니는 틈,
가느다란 줄기 끝에서 노란 수술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것이 줄꽃임을 직감했다.

사진을 찍으려 애를 썼지만,
하늘거리는 줄기는 내 촛점을 비웃듯 이리저리 도망쳤다.


결국 영상으로 방향을 바꾸자,
흔들림 속에서도 꽃은 오히려 선명하게 살아났다.


실제보다도 영상 속에서 더 또렷이 빛나던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줄꽃을 온전히 마주한 셈이었다.

줄(Zizania latifolia), 습지의 황금빛 노래


줄은 벼과에 속하는 대형 습지식물로,
논과 하천변, 얕은 연못가에서 키가 1.5~2.5미터까지 자란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크고 성긴 원추꽃차례를 세우고
노란 수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바람 속에서 춤을 춘다.


뿌리줄기가 굵게 뻗어 토양을 단단히 붙잡아
습지 생태계를 지탱하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마코모다케(マコモタケ)’라 불리는
어린 줄기를 식용으로 즐겨 왔다.

이름이 들려주는 이야기


‘줄’이라는 이름은 흔히 쇠를 다듬는 공구를 떠올리지만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훈몽자회》(1527)에 기록된 ‘줄(絲)’은
실을 뜻하며,
‘줄기’, ‘줄타기’처럼 가늘고 길게 뻗은 것을 가리키는 옛말이었다.


키 큰 줄의 곧은 줄기와 늘어진 꽃차례는
그 옛말의 의미와 꼭 맞아떨어져
오늘날까지 ‘줄’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가을 습지에서 만나는 계절의 주인공


서울식물원 숲문화학교에서 처음 들었던
강사 선생님의 상기된 목소리,
“이 꽃을 보는 순간 너무 행복했다”는 고백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신트리공원에서 드디어 만난 줄꽃은
단순한 습지의 풍경이 아니라,
가을의 황금빛 숨결을 그대로 품은 주인공이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논둑이나 연못가를 스쳐 지나가다
황금빛으로 흔들리는 줄꽃을 만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땅이 들려주는
가을의 노래일 것이다.


https://youtu.be/cv08_Xwxzmw?si=-KZ0tBcqeQz5_z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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